[배학수의 문화풍경] 물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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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철학과 교수

에피쿠로스 학파 저술 담은 파피루스
최신 기술로 두루마리 개봉 없이 문자 파악
고대 철학의 원본 판독에 큰 기대감

부산이나 경남 통영처럼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로부터 8km 떨어진 곳에 헤르쿨라네움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서기 79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때 생기는 화산 쇄설류 때문에 20m 아래에 덮이어 버렸다. 그 후 1600년 동안 헤르쿨라네움은 위치조차 잊힌 채 매몰되어 있었고, 그 위에 에르콜라노라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헤르쿨라네움의 자매 도시 폼페이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때 화산재로 매몰되었다. 두 도시는 성격이 달랐다. 폼페이는 부산한 상업 도시이다. 헤르쿨라네움은 작고 조용한 항구 도시인데, 매우 아름다워서 약 250km 북쪽에 있는 로마의 귀족들이 별장을 두고 있었다. 줄리어스 시저의 장인인 유력 정치가 피소도 화려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를 추종하고 있었고, 필로데모스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를 후원하고 있었다. 피소의 저택에는 큰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서기 79년 필로데모스는 여기에 상주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에피쿠로스 학파의 저술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화산 폭발의 전조가 보이자 직원들은 파피루스의 저술들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둘둘 말아서 항만으로 이송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고온의 화산 물질이 덮쳐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숯덩이처럼 탄화되었다. 18세기 중반 터널을 뚫어 피소의 저택을 조사했을 때 약 1800개의 파피루스 스크롤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헤르쿨라네움 스크롤’ ‘헤르쿨라네움 파피루스’라고 부르고, 피소의 저택을 ‘파피루스 저택’이라고 한다.

피소 도서관의 파피루스 컬렉션은 정말 귀중하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고대 철학자의 저술은 모두 중세의 원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원전을 수도사들이 몇 세대를 걸쳐 베껴 쓴 것인데, 그사이 수정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헤르쿨라네움 파피루스는 우리가 고대의 문헌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물에 젖은 화장실 두루마리를 펴기 힘들 듯이, 탄화된 파피루스 스크롤을 펴서 거기에 적힌 글자를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칼로 스크롤을 잘라서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파피루스는 훼손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수은 액체를 스크롤에 부어 조각들을 파괴하지 않고 분리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수은의 밀도 때문에 파피루스는 가루가 되었다.

파피루스 스크롤의 가치를 그 당시 사람들은 아주 낮게 평가했다. 나폴리의 왕은 파피루스 스크롤이나 조각들을 외교적 선물로 다른 나라에 제공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6개를 얻어 프랑스 학술원에 넘겨주었고, 영국 왕은 캥거루 18마리를 주고 18개를 얻었는데 옥스퍼드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스크롤은 대개 국립 나폴리박물관에 있다.

피소의 도서관은 사실상 읽을 수 없는 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파피루스 스크롤은 파괴하지 않고는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크롤을 열기 위한 초기의 위험한 시도 이후 20세기부터는 스크롤을 열지 않고 그냥 보관만 했는데, 21세기에 돌파구가 뚫렸다. 미국 켄터키대학의 전산학과 브렌트 실즈 교수팀이 의학의 인체 스캔 기술과 인공지능, 데이터 과학을 통합하여 스크롤을 물리적으로 열지 않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가상 개봉(virtual unwrapping) 방법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전에 스캔한 파피루스 스크롤의 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글자를 해독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대회를 2023년 개최했다. 이것이 ‘베스비우스 챌린지’이다. 작년 연말에 마감된 1회 대회의 결과가 지난 2월 초에 발표되었는데, 3명의 연합팀이 대상으로 70만 달러를 수상했다. 그들이 해독한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필로데모스의 쾌락에 관한 저술 마지막 단락이다.

‘음식의 경우처럼, 물질의 부족이 풍족보다 우리를 반드시 더 즐겁게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것이 단락의 첫 문장이다. 이 저술에서는 부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주제는 현대에도 뜨거운 토론 거리이다. 물질만능주의는 물질이 행복의 핵심 요소라고 간주하는데, 필로데모스는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듯하다. 이것은 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입장과는 반대이다. 돈을 버는 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물질을 추구하지 않아야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다.

아직 손대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헤르쿨라네움 스크롤은 600개가 넘는다. 이것을 가상 개봉 기술로 연다면 우리는 고대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피소의 도서관에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방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헤르쿨라네움에 도서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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