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슈퍼 엔저와 이중가격제
일본 엔화 가치가 뚝 떨어지면서 희비쌍곡선이 그려지고 있다. 엔화 환율이 27일 884원대(매매 기준율)로 8년 만에 최저 수준을 맴돌고 있다. 일본중앙은행이 제로금리를 고수하며 통화 완화 정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저 덕분에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을 괴롭혔던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 우려로 바뀌는 분위기다. 1%대에 머물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4%대로 올라섰다고 한다. 일본인 젊은 세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살인적인 물가 상승이다.
엔화 값이 싸지자, 일본 여행은 봇물이 터진 상황이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은 2506만 6100명이었고, 그중 4분의 1 이상인 695만 8500명이 한국인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2023년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서 쓴 돈만 47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1월 한국인 관광객 비중은 셋 중 한 명으로 더 커졌다. 최근 김해국제공항에는 골프채와 여행용 트렁크를 들고 일본으로 가는 한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식당과 호텔, 골프장에서 한국과 비용 차이를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싸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저렴한 여행지로 변한 일본에서 현지인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고달파지는 모양새다. 인플레이션에 관광객들의 씀씀이까지 겹치면서, 대도시와 이름난 관광지의 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식당마다 관광객들의 장시간 줄서기로 일반 직장인들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마저 빈번해지고 있다고 한다. 경제 성장 정책과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국민 행복감에 역할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오죽했으면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의 해외 관광객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외국인들에게만 돈을 더 받는 ‘이중가격제’ 도입 주장마저 나올 정도이다. 자국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여주면 호텔이나 음식점, 관광지 등에서 할인을 해주는 이중가격제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나 보던 가격 정책이다.
더 큰 문제는 빈인빈부익부다. 수도권 집중 폐해가 심각한 일본에서 관광객은 대도시에만 집중되는 모양새다. 최근 부산 직항 노선이 개설된 인구 50만 명의 중소도시는 주요 관광시설과 온천·공항셔틀 무료 이용권을 뿌리면서 관광객 유입에 혈안이다. 엔저 시대, ‘부자 나라와 가난한 국민’ ‘대도시와 소도시’. 일본 곳곳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은행 문 닫기 전에 엔화나 사러 가야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