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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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1943~ )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시집 〈가뜬한 잠〉(2007) 중에서

사랑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더라도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지고, 그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는 귓가에 불현듯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나도 모르게 오래도록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는 홀로 쓸쓸히 낡아가는 영혼에게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끝날 수 없음을 부르짖는 증표로 나부낀다. 회한이 물결처럼 차오르는 밤!

상처는 각인이다. 홀로 내는 고추씨 같은 울음소리는 얼마나 깊은 상처의 흔적인가! 잴 수 없는 아픔의 깊이는 ‘맵게 우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가슴의 심층에 담긴 사랑은 온몸을 울림통으로 만들어 현(絃)을 켠다. 하여 잠 못 드는 밤, 이명처럼 울리는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영혼에 새기는 소리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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