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읽기] 상실로 아파하는 우리 삶에 대한 은유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지렁이의 불행한 삶에 대한 짧은 연구 / 노에미 볼라

<지렁이의 불행한 삶에 대한 짧은 연구> 표지. <지렁이의 불행한 삶에 대한 짧은 연구> 표지.

단 한 번도 지렁이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렁이의 불행한 삶에 대한 짧은 연구>를 읽고 그런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떻게 이 어여쁘고 애잔한 생명체를 마치 세상에 없는 양 모른 척 살아갈 수 있었단 말인가.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지렁이 성애자’인 저자는 지렁이의 식습관, 생체 구조, 서식지 등의 정보를 감각적인 그림과 위트 넘치는 글로 풀어낸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수나 있었을까. 사실 지렁이는 폭우가 내릴 때 아늑한 땅굴 속에서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다만 땅굴 속 불어난 빗물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없이 땅 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비 내린 날의 땅 위 역시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게다가 지렁이는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유전적으로 갖추지 못했다. 뾰족한 가시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추위를 막아 줄 털도, 단단한 딱지도 없다. 땅 위에서 지렁이는 불의의 사고로 몸이 두 동강 나버린다.

하나에서 둘이 된 지렁이(잘려진 각각의 생체는 제각각 생명 활동을 이어간다)는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다. 반쪽의 이성(理性)이 되어버린 가여운 ‘2분의 1’ 지렁이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할까. 온전한 ‘나’일 수 있을까. ‘결국 지렁이는 돌멩이가 되기로 합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요.’(196페이지) 그러나 지렁이는 돌멩이가 될 수 없었다. 돌멩이는 울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야 한다. 지렁이는 많이 아프고, 많이 울었다.

자연과학 그림책으로 위장한 지렁이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 또한 우리 삶에 대한 ‘은유’다. 지렁이를 통해 전해진 상실의 공감대는 작은 위로를 남긴다. 아주 살짝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만큼만. 노에미 볼라 지음/김지우 옮김/단추/264쪽/3만 8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