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도 억울한데… 건물 관리까지 떠안은 임차인
잠적한 임대인 대신 소방관리
체납에 CCTV 철거 등 ‘고통’
보증금 건지려면 이사도 못 해
“구제 위한 특별법 빨리 통과를”
인천에서 2000채가 넘는 주택을 보유하며 전세 사기를 벌인 이른바 '건축왕'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피해자의 1주기를 앞두고 2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세금도 잃었는데 벌금까지 낼 순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거죠.”
부산 수영구에 사는 정 모(34) 씨는 최근 전세 피해를 본 주택 ‘소방안전관리자’가 됐다. 소방안전관리자는 건물 소방시설을 관리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초기 대응을 맡는다. 통상 건물 소방안전관리자는 임대인이 맡는다.
하지만 임대인은 전세보증금 미반환 이후 병원 입원 등을 이유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새로 관리자를 지정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야 해 어쩔 수 없이 정 씨가 부담을 떠안았다.
지난해 7월에는 폭우가 내려 지하 1층에 있는 건물 주요 시설이 침수돼 수도 펌프와 소방 펌프가 망가졌다. 스프링클러도 6개월째 고장 나 있는 등 건물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세대 내 수도로 연결되는 펌프는 임차인들이 사비 250만 원을 들여 복구했다.
다만, 소방 펌프 복구엔 2000만 원이나 되는 돈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고장 난 채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관리자가 없는 열악한 주택에 거주하며 이중고를 겪고 있다. 피해를 본 것도 억울한데, 건물 관리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피해자들은 지원법 마련을 촉구했다.
부산 전세 피해자들은 전세금을 잃은 것도 모자라 날로 환경이 악화되는 건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집주인이 파산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관리가 안 되는 주택을 떠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했다.
부산시는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하면 전세피해지원센터를 통해 피해자를 원스톱 지원하기로 하는 등 대책을 내놨지만 ‘주택 관리’는 지원하지 않고 있다. 민간주택은 소유자가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임대인이 잠적한 경우가 많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들 고통은 커진다. 동래구에 사는 전세 피해자 김 모(32) 씨는 최근 살고 있던 주택 CCTV가 철거됐다고 밝혔다. 김 씨는 집주인이 대여료를 내지 않자 방범 업체에서 CCTV를 떼어간 것으로 추정했다. 높아진 범죄 위험은 주민 몫이다. 전세사기에 이은 2차 피해다.
피해자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공매에서 전세금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집을 떠날 수 없고, 떠날 돈도 없다고 호소한다.
김 씨는 “집 주인이 수도세를 내지 않아 단수 경고문이 날아오거나 엘리베이터에 누가 토를 해도 치우지 않는다”며 “전세 피해를 입은 후 전반적인 건물 관리가 아예 안돼도 집을 떠날 수 없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전세 피해자 주택 관리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관련 법이 통과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27일 여당 의원 퇴장과 야당 의원 찬성 속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된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에는 전세사기 피해주택 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지자체장이 실태 조사를 거쳐 최장 2년간 위탁 관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사각지대 보완책과 함께 담긴 ‘선구제 후회수’ 방식 피해자 지원책에 정부·여당이 반대하면서 특별법 논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있어 3~4월 중 본회의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개정안이 여야 합의 없이 직회부됐기 때문에 30일 숙려 기간도 필요하다. 이 기간에 합의되지 않으면 30일이 지나 처음 열리는 본회의에서 상정 여부를 결정하는 무기명 투표가 이뤄진다.
신상헌 부산전세사기피해자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상위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 지자체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부분도 한계가 있다”며 “잠적하거나 건물 관리에 손을 놔 버린 임대인들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임차인들을 생각해서라도 관련 법이 빠르게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