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미래의 길,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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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지난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2400km의 여정이었다. 서부의 히바와 남부의 부하라를 이어주는 키질쿰 황야, 크기가 대한민국의 3배나 되는 붉은 사막은 기차로 7시간을 가도 모래, 자갈, 마른 관목뿐이었다. 그나마 눈이 희뜩희뜩 날리는 바람에 적막과 황막함이 덜했다고나 할까.

실크로드가 달라지고 있다. 타슈켄트엔 차량이 폭증하여 코로나19 이전에는 차로 10분이면 가던 거리를 1시간이나 가야 했다. 준법의식도 강화되어서 차창으로 작은 쓰레기라도 버리면 누군가 득달같이 사진을 찍어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면 벌금 통지서가 바로 집으로 날아든다. 시내엔 대규모 IT 단지가 새로 세워지고 있다. 땅은 계속 국가 소유지만 건물은 매매가 허용되어서 외국인도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부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의 도시 사마르칸트도 도시 면모가 일신되고 거리가 복잡해졌다.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

한층 더 풍성해진 다중문화

전통과 현대 공존으로 활기

수천 년 역사의 도시 부산

경제논리에 다양성 사라져

문화적 다채로움 되찾아야

이번 여행의 뒷맛을 크게 세 가지로 표현한다면 더 화려해진 풍성함, 전통과 현대의 동거, 더 새로워진 다중문화라고 할 수 있겠다. 동서양의 사람, 산물, 사상이 만나는 실크로드는 본래 다중심의 천연색 사회이지만, 점점 더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지는 듯하다.

식탁부터가 그렇다. 이번에도 호라즘의 삼사(화덕 만두), 아무다리야강의 잉어 튀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쁠롭(기름 볶음밥), 터키 할랄 음식, 중앙아시아화된 이탈리아 피자, 코카서스의 가지 튀김과 포도잎 요리, 러시아의 깔바사(소시지 일종)와 카샤(죽) 등 더 다양해진 음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마시는 차도 전 세계의 모든 차가 다 들어와 중앙아시아의 향과 섞여 독특한 풍미를 냈다.

하루가 다르게 가속되는 도시화 속에서도 전통은 곳곳에서 이전처럼 도시의 주인으로 남아, 기원전의 조로아스터도 호라즘 지방의 50여 흙성채에 그대로 남아 숨 쉬고 있고 건축물의 구조, 벽면의 상징과 무늬에 건재하다. 2500년 역사의 부하라 시민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안에 촛불부터 먼저 켠다든지, 결혼식 때 신랑이 신붓집에 가서 집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신부를 메고 불을 세 번 돈다든지 하는 조로아스터 시대의 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과 로마제국을 연결하던 옛 물류 창고 캐러밴 사라이도 낙타와 말을 매어두던 1층 공간은 그대로 둔 채 호텔이나 식당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전통 시장인 보조르나 환전, 모자, 금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전문시장 타키도 수천·수백 년 된 둥근 지붕을 이고 옛 멋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현대적인 백화점과 수공업자들의 공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네스코도 이런 문화가치를 인정하여 이들 전통 공방의 가죽, 금속세공, 대장간, 도자기, 비단 제조 기술 등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있다.

중세 티무르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도 이전의 우중충한 모습을 걷어내고 국제 관광도시로 변하고 있다. 특히 새로 설치한 야간 조명이 품위 있고 아름다워서, 밤에 나가본 레기스탄 광장은 이게 현실인가 싶을 정도였다. 은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모스크, 웅장한 미나렛 첨탑 그리고 옛 종합대학인 메드레세가 검은 밤과 어우러져 저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어느 도시 어느 구역을 가나 활기가 넘친다.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지고, 지방과 수도가 각자의 색과 문화를 유지한 채 공존하고 화합하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 고대 페르시아, 헬레니즘, 조로아스터 전통, 아랍 문명, 중세의 튀르크와 티무르 문명, 근현대의 러시아 문화가 겹겹이 쌓여있고 보존되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그 모든 지층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살아나 현대와 어울리면서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현실은 매우 수준 있어 보였다.

우리 부산도 거칠산국으로부터 시작하면 거의 2000년 역사의 도시이다. 그리고 갈수록 외국인이 늘어 내년쯤에는 초등학교 교실 1개 반에 4~5명의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 입학한다. 그런데 부산 어디에 문화적 다채로움과 풍성함이 있을까. 전통은 경제 논리와 현대문명에 눌려 거의 빈사 상태가 아닌가 싶다. 사회적 요청은 각 민족의 개성과 문화를 존중하는 다중문화 사회인데, 과연 부산 시민의 의식과 생활은 국제적일까. 현재의 국민소득 수치로만 세계를 재단해서는 문화민족, 문화도시라고 할 수 없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는 15~16세기의 대항해 시대 이후에 사라진 과거의 길이 아니다. 빠르게 다가오는 이 다중문화 시대에 중앙아시아 비단길이 사실은 우리가 새롭게 본받고 연구해야 할 미래의 길은 아닌지, 같이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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