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계층사다리 아닌 정글짐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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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계층 고착화와 대물림 심화
불확실성·위험성 역시 커져
교육·입시 제도 대안 못 돼

사회 복잡성은 기회일 수도
폭넓은 경험과 진로 제시해
재기 위한 안전망 확보 필수

지금 한국사회에 계층사다리는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계층사다리의 꼭짓점에는 의사가 자리한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의대 증원 결정이 지방의료 강화를 목적으로 추진된 취지와는 별개로 일련의 갈등은 어느 직업군보다 의사라는 직업이 한국사회에서 지니는 성공의 상징성과 강한 영향력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층사다리는 교육을 통해, 곧 열심히 공부하고 높은 성적을 거두면, 계층을 상승할 수 있다는 희망사다리로 여겨져 왔다. 직업 활동에서 경제적 보상이 더욱 중시되고 또한 직업별 금전보상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현재 고소득 전문직종의 의사는 단연 인기 직업이다. 때문에 코피 터지는 입시경쟁을 뚫고 최상위권의 극소수만이 의대행 티켓을 얻을 수 있다. 저소득 계층에서 의사를 배출한다면 이른바 ‘개천용’(개천에서 난 용) 모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개천용’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의과대학 내 고소득층 자녀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져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의대생의 경우는 74%가 월소득 1100만 원 이상 가구라는 발표가 있었다. 지난해 전국 의대 정시 신입생 4명 중 3명이 ‘N수생’이라고 한다. 가정의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계층 상승이 어렵다는 통계들은 가구소득에 따른 계층 고착화와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현대사회에서 계층사다리는 사라지고 ‘계층정글짐’으로 변모하고 있다.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구름사다리와 정글짐을 시각적으로 상상해 본다. 구름사다리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계단처럼 타고 오르는 기구라면 사방에서 출발하는 피라미드형의 정글짐은 사다리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다. 사다리는 앞사람을 따라 일방향으로 올라가면서 확실성과 안정성이 보장되지만 정해진 방향 없이 제각기 오르는 정글짐에서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커진다. 또한 과거 사다리를 타는 역량이 교육에 집중되었다면 정글짐에서의 경쟁력은 구조를 조망하는 지도(정보)나 장비(자원)와 네트워크(인맥) 등 요소가 복합적이다.

형태의 변모는 정부의 역할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정권 교체기마다 대입제도를 뜯어고치며 계층사다리 재건을 표명해 왔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청소년기의 공부를 성장이 아닌 계층 상승을 위한 도구처럼 여기도록 교육정책이 입시 위주로 다뤄진 결과 학생들은 자신의 강점과 적성을 탐색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다양한 갈래의 진로를 접해볼 수 있는 정보의 격차는 계층사다리의 시공간적 상상력을 제한하며 정글짐으로 변화한 환경을 파악하는 데 인지적 불평등을 발생시킨다.

한편 자신의 꿈과 기회를 포착하더라도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높아진 환경에서 재기의 여력에 따라 도전 여부를 결정하는 실천적 차원의 불평등도 발생한다. 즉, 정글짐 아래에 얼마나 두툼한 쿠션이 나를 받쳐주고 있는지에 따라 추락했을 때 생존 가능성이 달라진다. 사다리보다 위험한 정글짐은 낙하 확률이 커졌고 내가 가진 쿠션이 미약해 떨어지면 회생불가한 조건에서는 정글짐에서 한 발 내딛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정글짐의 변모는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다. 사다리보다 입체적인 정글짐은 진로에 정답이 없고 어떤 방향에서나 오르막길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정체가 발생하거나 아래쪽 사람에게 추월당하는 사다리는 수직적인 사고에 갇히는 반면 정글짐은 양옆으로도 밧줄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수평적인 이동이 가능하고 잠시 멈춰서도 뒤처짐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자신의 길을 창의적으로 개척하며 오르기에 단순한 비교경쟁도 덜할 수 있다.

사다리와 정글짐을 계층 이동에 대입한다면 결국 기회의 평등은 소수의 최상위권을 위한 독점적인 교육제도가 아닌 각자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폭넓게 제공하는 것과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특히 추락하면 즉사하는 살벌함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누구나 확실하고 안정적인 길을 원하기에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얻은 성취는 보상심리를 강화시키고 성적으로 꿈을 결정해 왔다. 다양한 삶의 가치와 방향을 발견하고 시도해 볼 수 있다면 모두가 일률적으로 같은 사다리에 오르지 않고 직업적 만족감 역시 금전적 이해로부터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정글짐 내 활발한 이동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수직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이동을 통하여 급변하는 시대에 유연한 진로 설계와 도전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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