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좌파를 위한 이 시대의 '공산당 선언'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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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수전 니먼

부족주의에 얽매인 '워크' 비판
'좌파 바로 세우기' 철학적 투쟁
보편적 정의를 위한 '연대' 강조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표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표지.

좌파란 무엇인가.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원칙주의 좌파 사상가가 던진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메시지가 책으로 출간됐다. 철학자 수전 니먼이 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워크’에게 빼앗긴 ‘좌파’라는 이름을 되찾아 오기 위한 철학적 투쟁이다. ‘워크’는 ‘깨어 있다(woke)’라는 단어에서 비롯해 ‘불의에 맞서 깨어있는 상태 혹은 깨어있는 사람’을 뜻한다. 서구사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최근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조롱하는 단어로 의미가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책의 여러 곳에서 PC의 편협성을 공격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것을 두고 갈채를 보냈지만, 조르자 멜로니의 정치적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이탈리아 정치 지도자보다도 파시즘에 가깝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못했다. 저자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된 우연적인 속성들, 그리고 여러 날 숙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원칙들,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멜로니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전자이고, 정치적 성향은 후자이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후자가 더 중요하다.

저자는 전 세계 인민의 단결을 외쳤던 좌파가 인종·성별·지역 등의 일부 정체성만을 내세우는 ‘부족주의’로 쪼그라들고 있음을 개탄한다. 이견은 있겠지만 일부에선 한국 정의당의 실패 원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무릇 좌파가 추구해야 할 바는 부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다. 저자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2012년 미국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방범요원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사망한 희생자가 다만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인간(그것도 어린 소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워크 역시 억압·차별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다. BLM 운동을 주도한 것도 워크였다. 그러나 부족주의에 갇혀 있는 한 워크는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작은 목표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화된 개인에 머무른다. 저자는 이런 워크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친 이가 미셸 푸코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정의와 권력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자. “전쟁을 벌이는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승리이다.” 결국 갈등의 양자는 각각의 정의로움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다. 이는 나아가 좌파들이 이루려는 정의로운 노력(사회 변혁과 같은) 역시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격하한다.

진보와 정의, 보편주의에 대한 저자의 신념은 너무 오래간만에 듣는 선명한 언어인지라 나를 달뜨게 한다. 그러나 늙어버린 나는 불행하게도 더이상 세상 모두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의의 존재를 마음 한 껏 믿지 못한다. 저자는 부족주의가 우파의 교묘한 공격에 이용당할 여지가 크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보편주의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BLM 운동에 반발한 백인들의 ‘모든 이의 목숨이 소중하다(All Lives Matter)’ 운동은 그 수사만으론 오히려 BLM에 비해 더 보편적이지만, 정작 그 목적은 흑인 차별이라는 문제에서 초점을 돌리려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의 포기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투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거대 양당이 득점 아닌 실점 경쟁을 벌여도 특별한 대안이 없고, 정의당이 원외정당으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 ‘좌파 바로 세우기’에 대한 노력은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모처럼 머리와 가슴이 함께 뜨거워진 책. 수전 니먼 지음/홍기빈 옮김/생각의힘/296쪽/1만 9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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