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영웅의 귀환(?)
부산과 자매도시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을 흐르는 네바강 앞 카페에서 보드카 한잔은 평생의 추억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 네바강변 에르미타주박물관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들끓었다.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티즈, 고갱, 피카소 등 교과서에서 봤던 작품 대부분을 직관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에르미타주보다는 인근의 국립러시아미술관으로 곧장 향한다. 러시아인의 삶과 역사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은 대문호 톨스토이 초상화로 유명한 러시아 대표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볼가 강의 배 끌기’ 등은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유명하다. 특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차르(황제)의 전제정치 하에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막 돌아온 초췌한 몰골의 혁명가와 그를 맞는 가족의 미묘한 심리를 묘사했다. 가족들은 낯선 이방인처럼 자신의 아들, 남편, 아버지를 맞이한다. 잊고 살았던 그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안타까움과 원망, 앞으로 펼쳐질 시간에 대한 걱정이 쌓이면서 거실은 긴장감이 팽배하다.
러시아 쿠르스크로 파견된 북한 병사 1만 1000명이 우크라이나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이 “하나 둘, 하나 둘”, “기다리라” 등 북한군 내부의 무선 통신을 감청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북한 정부는 러시아 파병 관련 사실을 알리지 않고, 참전 군인의 가족을 집단 이주·격리하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내부 동요와 탈영을 막으려는 조치로 추정된다. 북한군 일부의 전사 소식까지 나오고 있고, 포로로 잡힌 북한군의 인터뷰 장면이 텔레그램과 TV에 언제라도 쏟아질 수 있는 상황이다.
언젠가 포로로 잡힌 뒤 종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북한군의 모습에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그림이 겹쳐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장병들이 서구의 문화와 정보를 갖고 돌아올 것에 대한 북한 정부의 두려움이 벌써부터 걱정될 지경이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영웅’ 호칭을 달 수 있을까. 전장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힐 것이 뻔한 어린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레핀은 최전선인 우크라이나 작은 도시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레핀도 이런 시대를 예상했을까. 신냉전이라는 역사가 만들어 낸 또 다른 형태의 비극이 멈추길 바랄 뿐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