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박사' 국회의원 1위
‘박사(博士)’는 흔히 알듯이 학문의 세계에서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자격과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높은 수준의 학위다. 자기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주제를 정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 등 분야에 종사하는 박사 학위 연구자의 숫자는 그 나라의 국가경쟁력을 보여주는 지표로도 활용된다. 그만큼 박사 학위가 갖는 전문성과 연구 역량은 바로 국가적 자산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모든 분야가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과학기술·경제·사회 영역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4류’ 취급을 받는 우리나라의 정치.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국회의원의 박사 학위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시쳇말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가방끈’이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다. 미국 듀크대 등 6개 대학 연구자들이 2015~17년 국회의원을 지낸 97개국 정치인들의 학력을 조사한 논문 내용을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인구 200만 명이 넘는 56개국 중 유일하게 국회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박사 학위를 소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우크라이나 대만 슬로베니아 몽골 루마니아 등이 박사 학위 비율이 높았으나 전체의 4분의 1을 넘는 나라는 없었다. 미국 의회의 경우 박사 학위는 적은 대신 3분의 2 이상이 석사 학위였다고 한다. 반면 유럽의 이탈리아 노르웨이 영국 등은 중등학교 학력을 가진 의원들의 비율이 4분의 1 가까이 돼 눈길을 끌었다. 수년 전의 상황을 조사한 내용이지만 대체로 정치 입문 경로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어쨌든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가방끈이 가장 길다고 하니, 앞으로 학력과 관련한 한 국회의원들을 향해 ‘무식’ 또는 ‘못 배운’이라는 말은 되도록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의정 활동에 있어서도 학위에 걸맞은 행동과 품격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으니 국민들에게서 ‘식자우환’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하다. 박사 학위를 정계 진출을 위한 하나의 장식품으로 여긴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의원들이 진정한 ‘박사급’ 의정 활동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일이다. ‘가방끈 긴 국회라고 해서 별로 다른 것도 없더라’라는 비아냥이 자꾸 국민들 사이에 회자하지 않도록 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