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힘
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예술적 안목은 성숙한 사회의 잣대
지역의 숨은 고수들, 관객들 불러들일
매력적인 기획 공연 많이 만들어야
시월은 참으로 좋은 달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비가 내리는 날도 적으며 습도까지 적당해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조선 후기에 농업 기술 보급을 위해 우리말 노래로 쓴 〈농가월령가〉는 절후에 따라 12개월 동안 매달 농가에서 해야 할 일과 풍속을 소개했다. 음력 9월에는 가을 추수의 풍요와 이웃 간의 온정을 노래한다. 추분이 지나고 한로가 되면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오곡백과를 열심히 수확하고, 상강이 되면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꽃이 활짝 피어나는 절기가 된다. 그야말로 일 년 중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달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 부산은 올해 ‘페스티벌 시월’이라는 이름으로 국제 행사와 지역 축제 17개를 함께 묶었다. 10월 1일부터 8일까지 집중적으로 개최해 개별 이벤트의 정체성과 강점을 유지하고 자연스러운 네트워킹까지 유도하는 실험적인 시도였다. 10월 10일 자 〈부산일보〉에 따르면 행사 전체 관람객은 작년보다 33%나 늘어났다 한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이벤트가 겹치는 바람에 부산 시민의 문화적 일상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홍보까지 부족한 수많은 공연 중에 좋은 것을 골라서 즐기는 것은 전적으로 ‘안목’에 달렸다. 공연을 즐기는 방법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더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라이브 공연은 매체나 음반을 통해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안긴다. 그 작품에 대한 기본 구성 요소를 알고 간다면 이해도가 높아져 훨씬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로 안목은 두 글자 모두 눈을 뜻하는 글자다. 목(目)이 단순한 눈의 모양만을 나타낸다면, 안(眼)에는 어떤 목적을 가진 능력이란 뜻이 포함된다. 물리적으로 제한된 것에서 사물의 가치를 변별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안목은 보고 아는 견식 또는 식별력이다. 특히 예술에서 안목이란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말하며, 단순히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 작품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해와 그 작품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재료와 기술과 양식을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이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그 작품의 장단점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능력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예술적 안목을 기르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공연장이나 미술관을 찾는 횟수와 정확히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긴 호흡으로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연히 읽은 어느 철학자의 글에서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은 없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면서 획득하게 된다’며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라 했다. 조선 시대에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던 문장가인 유한준은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쌓이게 되니 그것은 헛되게 쌓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요컨대 자신이 아끼고 보면 그것이 쌓여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둘 다 같은 맥락인 것 같지만 분명 차이는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내용은 애정을 가지고 보는 만큼 안목이 생긴다는 뜻이다.
부산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까다로운 감상자나 숨은 고수들이 꽤 많다. 문화예술에 관한 인플루언서들을 부르고, 그들의 평에 공감한 관객까지 불러 모으는 일은 예술가의 끊임없는 노력과 기획자가 잘 준비한 좋은 프로그램에서 출발한다. 시대를 통틀어 최고로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는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며, 사흘을 연습하지 않는다면 관객이 안다”고 했다.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연습하지 않는 예술가나 공부하지 않는 기획자가 많은 관객을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술의 계절에 부산에서 펼쳐진 ‘페스티벌 시월’에는 좋은 기획도 있었다. 올해로 2년 차를 맞은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빈 객석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했다. 음악 공연 부분에서 참신한 기획을 기대했지만 프로그램 구성이나 완성도가 기대에 못 미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시아 대표 공연예술마켓’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시장에 내놓을 새로운 월드뮤직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장이 될 수는 없을까? 몇몇 초이스 공연(무대 중 으뜸으로 꼽는 공연)에서는 때때로 해외 델리게이트(공연산업 전문가)들의 한숨도 들렸다.
명성에 빠지지 말고 보다 넓고 깊은 시야로 미래 가치를 지닌 매력적인 예술 상품을 알아보고 관객에게 내놓는 안목은 지속 가능한 예술 시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