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K가짜 노동
‘조직을 망치는 간단한 현장 매뉴얼’(Simple Sabotage Field Manual). 1940년대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이 제작한 ‘스파이 교본’이다. 적대국의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조직력 와해 작전을 위해 개발됐다. 멀쩡한 조직을 쓸데없는 일로 공회전시켜 망조를 들게 만드는 필살기의 집대성으로 꼽힌다.
상대편에 침투한 비밀 요원의 임무는 ‘엑스(X)맨’이 되는 것이다. 명령·지시 체계 준수를 강요하면서 회의와 위원회를 자주 열어야 된다. 위원회는 가급적 5개 이상을 소집하고, 회의 때마다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아 조직에 만성 피로를 안긴다. 또 모든 보고는 문서를 원칙으로 하고, 중간 검토를 많이 거쳐 서류 작업의 양을 늘리는 것도 필수다. 필요 없는 결재를 두세 단계 추가하고, 막상 결정을 내릴 때는 책임 추궁의 부담을 상기시켜 판단을 더디게 만드는 게 요령이다. 중요 문서를 엉뚱하게 분류해 찾기 어렵게 만들고, 지시가 내려오면 ‘오해했다’는 핑계를 대며 수행하지 않는다.
50개가 넘는 지침을 관통하는 개념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가짜 노동’이다. 즉, ‘가짜 노동’이 만연하면 조직이 병든다. 문제는 80년 전의 조직 와해 비법이 지금 한국 사회에 기시감을 주는 점이다.
‘가짜 노동과 쓸데없는 규칙, 구조적 비효율과 책임 회피의 메커니즘으로 가득….’ 행정고시 합격 후 문체부에서 10년 일하고 사표를 던진 노한동 전 서기관은 신간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저효율 조직으로 전락하는 공직 사회를 작심 비판한다. 가독성만 중시하는 보고서의 범람, 연극처럼 변질된 간담회 등 관료 조직이 시대에 뒤처지면서 ‘가짜 노동’만 남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 근거인 업무 행태 상당수가 ‘스파이 교본’과 겹치는 대목은 참담하다.
지난해 행안부가 5년 차 이하 공무원 4만 8000명을 설문한 결과 이직을 고민한다는 비율이 70%에 달한 것은 낮은 보상과 함께 구태가 반복되는 업무에 실망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사기업 사정도 다르지 않다. 기성 조직 문화에 실망한 젊은 세대의 사표 행렬은 이미 사회적 현상이다.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AI(인공지능) 시대가 구가되고, 주 4일제가 임박한 시점에 ‘가짜 노동’의 활개는 역설적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구현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조직 내에 ‘엑스맨’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