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형제복지원 간 뒤 흩어진 가족… 실마리라도 찾아야” 김성호 형제복지원구제협의회 대표
남동생 귀가…모친·여동생 행방 몰라
조사 미포함 피해자들과 협의회 출범
‘진화위’ 연장되면 피해자 추가 조사
“암흑 속에 산 남동생, 생사도 행방도 모르는 여동생과 어머니. 형제복지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평생 끌어안고 산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는 길입니다.”
지난 3일 부산시 인권센터에서 만난 형제복지원구제협의회 김성호 대표는 “옛날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를 놓쳐 진상규명 길을 잃게 된 조사 미포함 피해자들이 꾸린 피해자 모임의 대표를 맡았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구제협의회에 현재 참여하고 있는 조사 미포함 피해자는 17명이다.
김 대표는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가족이다. 1977년 김 대표의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이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는데, 1979년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건 남동생뿐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행방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느 날 어머니가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서던 장면을 기억한다. 김 대표는 “나에게 함께 떠나자는 식으로 물어보았던 것 같은데, 나는 거기에 안 좋은 말로 가슴에 못을 박았던 것 같다”며 “그렇게 어린 꼬마애 둘과 엄마가 집을 나갔고, 몇 년 뒤 남동생만 집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이어 “동생에게 어디 있다가 왔냐고 물으니 ‘형제원에 있다 왔다’고 했는데, 당시엔 고아원이 많아 그러려니 했고 또 이후론 언급 자체를 터부시했다”고 말했다.
90년대에 들어 우연히 엄마와 두 동생의 형제복지원 입소 카드를 발견했는데, 당시 내용을 보고 의아하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입소 카드에 적힌 집 주소가 실제와 다르고, 입소 경위에 10년째 남편과 연락 두절 상태라고 적혀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3살, 6살짜리 아이가 있었겠느냐. 앞뒤가 맞지 않다”며 “1978년 12월 24일 시립병원에서 모친의 좌측 이마를 꿰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당시 원무실에서 대부분의 부상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어떤 폭력을 겪은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전했다.
김 대표에게 형제복지원 진상조사는 평생 미운 마음에 외면해 온 흩어진 가족사를 다시 조립해 나가는 첫 발이다. 그는 행방은 모르지만 이제는 세상을 떠났을 모친을 그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왔고, 최근엔 여동생의 해외 입양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유전자 정보(DNA)를 등록했다. 김 대표는 “처음 피해자 지원센터가 생겼을 때 센터를 찾아갔는데, 수용 당사자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하니 당사자가 직접 와서 신고해야 한다는 식이었다”며 “지금이라도 조사를 해달라고 나서는 건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입소 이후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서다”고 밝혔다.
그는 기약 없는 진화위의 조사 앞에 피해자들만 속수무책인 상황이 불합리하다며, 앞으로는 진화위 활동기간을 연장하고 추가 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끔 피해자들과 힘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2기 진화위는 오는 5월 26일 조사 종료를 앞두고 있다. 그는 “피해자가 나서도 소용이 없다는 식의 반응도 많고, 보상금을 노리냐는 불편한 시선도 많다”며 “나보다 훨씬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나서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이미 정부나 시에서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해 주지 않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이어 “진화위가 연장되면 남은 피해자들도 마저 추가 조사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게 최대 목표다”며 “아직 용기 내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다면 함께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