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사각지대’ 영 케어러 “고단한 삶에 자신감까지 잃어” [꿈을 저당 잡힌 '영 케어러']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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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정부 차원 실태 파악 서둘러야

또래 시선 의식 숨기기 급급
기준 제각각 파악조차 어려워
20만 명 이상 전국 분포 추정
전문가들 “사려 깊은 조사 필요”

지난해 연말 부산 사하구의 한 집에서 학생이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지난해 연말 부산 사하구의 한 집에서 학생이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부산 사하구에 거주하는 영 케어러 A(15) 군은 꼬박 1년째 하루 평균 6시간 동안 가족들을 챙기며 애를 쓰고 있다. 고등학교 진학이 목전이지만, 주변 친구들과 달리 매일같이 찾아오는 돌봄과 가사일은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A 군은 80대 할머니와 연년생 동생을 홀로 챙기며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도맡는 것은 물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돌본다. 고정적인 수입이 전혀 없어 할머니 앞으로 매달 나오는 기초연금 30만 원으로 근근이 생계를 지탱하고 있다.

A 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서려고 했다”며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해사고에 진학해 선원이 되고 싶었지만 성적이 모자라 갈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A 군은 현재 기술 관련 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조금이라도 빨리 취업에 성공하는 게 목표다.

A 군 사례는 지자체가 관할 사회복지관,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연계한 위기가구 파악을 통해 발굴했다. 지원 사업을 통해 긴급생계비, 학습비 등을 지원받은 뒤 A군은 학교생활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팀 박문호 과장은 “영 케어러에 대한 현황 파악이 어려운 까닭에 알음알음으로 ‘깜깜이 지원’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발굴이 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인 인원들도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 제각각… 파악 어려워

영 케어러는 자신의 어려움을 외부에 알리기를 꺼리는 탓에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민간단체와 연구기관 등 조사 기관별로 영 케어러에 대한 정의나 연령, 환경 등 기준을 달리 보는 까닭에 추정치도 다양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가족 돌봄 청년 기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경기권에만 영 케어러(13~34세)가 약 12만 3470명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4’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 13~34세에 이르는 영 케어러는 15만 3044명으로 파악된다. 통일된 파악 기준이 없지만, 전문가들은 부산, 수도권 등 전국에 10~30대 영 케어러가 최소 20만 명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 김지선 부연구위원은 “기관별, 조사별로 편차가 있어 관련 연구·지원기관도 의견이 분분하다”며 “정부 차원에서 통일된 기준을 마련, 이들을 파악하는 데 조속히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10대 영 케어러의 경우 또래 집단의 시선을 의식해 움츠러들거나 문제상황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한 것으로 확인된다. 〈부산일보〉 취재진과의 인터뷰에 응한 한 영 케어러 역시 “10대 때는 어려운 가정환경이 부끄러워 숨기기에 바빴다”며 “속으로만 삭이다 보니까 감정을 숨기며 살게되고 자신감까지 잃는 악순환에 시달렸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발굴에 깊이 있는 고민 필요

전문가들은 적극적인 발굴을 통해 영 케어러에게 우리 사회에서 안전하게 설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영 케어러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대해선 면밀한 고민과 사려 깊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동래종합사회복지관 김태은 사회복지사는 “해외에선 영 케어러들의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 영 케어러 그룹도 운영한다”며 “최소한 영 케어러와 직접 만나는 또래나 성인의 깊은 이해가 동반돼야 사례 발굴과 지원 연계도 무리없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정익중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일랜드의 온라인 플랫폼과 열린 긴급 상담전화처럼, 영 케어러의 발굴과 지원을 위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교육부를 중심으로 학교에서 이들을 지원할 방안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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