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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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산업시설 활용 세계적 흐름
이해 당사자들 모여 고민 필요
비민주적일 땐 국가주의 강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린 빅에어 서우강 경기장은 1919년 건설한 서우강 제철소 단지에 세워졌다. 역사비평사 제공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린 빅에어 서우강 경기장은 1919년 건설한 서우강 제철소 단지에 세워졌다. 역사비평사 제공

■근대의 기억, 산업유산/류은하 외 9명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자주 간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철마다 다른 꽃이 피고, 대밭에는 사시사철 푸르름이 머물러 있다. 금난새 뮤직센터에서 음악회를 들을 때면 보다 나은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F1963 도서관에서는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수명을 다한 고려제강 수영공장이 재생을 통해 변신한 결과다. 이곳이 아파트 단지가 되지 않고, 시민들이 사랑하는 복합문화공간이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산업유산’의 선물이었다.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산업시설을 유산으로 인식해 보존·활용하는 일은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이처럼 산업유산의 보존·활용 움직임이 활발해질수록 이해 당사자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아직 산업유산의 보전과 활용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되지 못해서이다. 당장의 경제적 효과를 우선시해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볼거리로 꾸미는 데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들은 폐산업시설을 그냥 새로운 볼거리가 아닌 ‘유산’으로 생각한다. 소중한 유산이니, 그곳에 담긴 수많은 기억 가운데 무엇을 보존하고, 지역 재생의 자원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이해 당사자가 모여 논의하는 과정을 당연히 거쳐야 한다. 그동안에는 ‘도시재생’이라는 말만 나오면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나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과 같은 해외 성공 사례를 떠올렸다. 언제까지 그것만 보고 있을 것인가. 한국의 현실에 맞는 산업유산을 논의해야 할 때다.

<근대의 기억, 산업유산>은 우선 구미 지역과 동아시아 지역으로 나누어 사례를 비교하고 있다. 1부에서는 산업고고학과 산업유산 보존 운동의 발상지인 영국을 찾아간다. 산업유산의 재활용 모범사례로 여겨지는 독일, 폐산업시설을 생태박물관으로 활용하는 프랑스, 탈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유령도시를 양산한 미국의 경우를 살펴본다.

2부에서는 중국, 대만, 일본, 북한의 산업유산 보존·활용을 비교한다. 동아시아 지역이라고 해도 정치체제와 경제구조가 다른 탓에 신기할만큼 스타일이 다르다. 중국은 산업유산을 공업에 한정해 ‘공업유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은 공업유산 보호의 법제화를 중앙보다 지방에서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점이 특징이다. 경제활성화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공업유산화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공업유산의 집단기억을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대만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산업화의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산업유산의 보존·활용에 적극적인 점이 눈에 띈다. 일본은 국가 주도의 선택적인 기억화로 주변국과 역사분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책의 말미에는 국내 산업유산 정책과 연구 동향을 정리하는 한편, 폐광을 활용한 지역 재생 사업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이 책은 다양한 연구자가 모여 지난 2020년부터 3년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동연구를 진행한 성과물이다.

각국의 산업유산에 담겨 있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갈 산업유산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의 현실과 상황에 맞는 산업유산의 보존·활용에 관한 논의는 이제부터 본격 시작이 아닌가 싶다. 폐산업시설을 산업유산으로 지정하고 지역 재생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거버넌스가 중요해 보인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놓고 다양한 이해 당사자가 모여 논의하고 고민하는 작업이 최우선이다. 그것은 민주적인 유산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한 유산 운동은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가주의나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또 하나 눈에 쏙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2011년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는 뉴욕시에 기존 다섯 개 자치구 이외에 여섯 번째 자치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바로 520마일에 달하는 뉴욕시의 수변지구(waterfront)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수변지구를 자치구의 경계와 무관하게 하나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뉴욕 시민에게 수변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공유지로 상상해 보자고 주문했다. 해양수도 부산에도 이런 상상력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 류은하 외 9명 지음/역사비평사/308쪽/1만 8000원.


<근대의 기억, 산업유산> 표지. <근대의 기억, 산업유산>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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