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말과 글이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이어령의 말/이어령
수백 권 책 중 이어령 말의 정수
수 십명 일일이 가려 뽑은 문장
짧은 말에 담은 깊고 넓은 사유
책 <이어령의 말> 표지.
글과 말은 한 개인을 판단할 때 주요한 자료가 된다. 언론 매체에 공개적으로 쓴 칼럼, 기고뿐만 아니라 일기장처럼 쓴 개인 SNS 글조차 논란이 되며 공직 자리에 지명된 후보가 사퇴 혹은 낙마 된 사례도 여럿 있다. 심지어 본인이 글을 삭제했지만, 온라인 공간의 ‘퍼나르기’는 여전히 이어져 소위 ‘박제’되는 경우도 흔하다.
408쪽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 <이어령의 말>은 이어령의 말을 모은 어록집이다. 천 개의 제목과 그 제목에 관한 생각을 담은 몇 개의 문장들로 꽉 채워져 있다. 사실 어록집이라는 형태는 한국에선 드물다. 자기만의 언어로 사유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고, 어록집으로 낼 만큼 방대한 저작물(강연 포함)을 남긴 작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록집의 사각지대인 한국 풍토에서 이 같은 책이 나왔다는 건 이어령이 가진 지혜와 사고, 지식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어령의 말>은 2022년 작고한 선생의 오랜 뜻이었다고 한다. 암 발병 후, 작고하기 7년쯤 전부터 직접 이런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는 것. 선생이 남긴 수백 권의 책 중에서 ‘이어령의 언어’로 불릴만한 부분을 추리고 추려 한 권의 사전으로 엮어내길 원했고, 그 한 권을 통해 후대의 독자들이 작가가 평생 해 온 지적 탐험을 쉽게 이해하길 바란다는 취지였다.
1960년 27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되었고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12년간이나 논설을 쓰며 그의 촌철살인 같은 글솜씨는 이미 소문이 났다. 1970년대에 여러 출판사에서 글 중 일부분을 발췌해 사전을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아직은 이르다며 먼 훗날 글이 쌓이면 내겠다고 사양했다.
선생의 마지막 부탁은 결국 남겨진 제자들의 사명이 되었다. 수많은 제자가 있지만, 선생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은 문장, 선생이 만들고자 했던 사전의 의중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제자, 수십 명이 3년간 매달렸다.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물 중 대상 도서를 선정하는 과정부터 실제로 일일이 밑줄을 그으며 <이어령의 말>에 담을 문장 후보들을 찾아야 했다. 시간성을 초월해 울림을 주는 문장들, 지적 상상력에 충격을 주는 문장을 위주로 담았고, 통찰력이 뛰어난 선생이 과거에 했던 예측과 전망이 이제 현실이 된 내용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책의 편집위원으로 참가했던 김민희 <톱클래스> 편집장은 “책을 넘기다 보면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페이지마다 튀어나오는데, 그것들을 다 긋다가는 ‘밑줄 전집’이 나와야 할 판이었다. 여전히 많은 이어령의 반짝이는 언어가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편집위원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된다. 실제로 리뷰 기사를 쓰기 위해 책 속의 주요 문장을 표시하다 보니, 형광펜 표시가 너무 많아 어떤 문장을 기사에 소개해야 할지 한참 고민이 될 정도였다. 적절한 비유와 명쾌한 정의, 유머까지 담은 문장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고 현실을 이겨내는 소시민에 대한 응원이 가득하다.
‘세상은 늘 죽을 만큼 괴로운 것들을 넘어서야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 당신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 사랑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뉘우친다는 것…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마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부정할 때, 높은 베개를 베고 코를 골고 있을 때 당신만은 눈을 뜨고 깨어 있어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곰하고 호랑이가 쓰디쓴 쑥과 매운 마늘을 먹고 백일을 지내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캄캄한 굴에서 견디는데,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가 버렸고, 둔한 곰은 백 일을 견뎌 사람이 되었지요. 이 신화를 생각해 보면,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한 마디로, 참을성으로 본 거지요. 곰이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자기가 견디면서 이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2~3개의 문장으로 완결되는 형식이라 책은 술술 읽어진다. 내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느라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말미에 와 있다. 유명인들이 직접 밝힌 마음에 드는 문장과 이어령 선생과의 인연에 관한 후기도 재미있다. 시대의 어른이 남긴 선물 같은 책이다. 이어령 지음/세계사/408쪽/2만 2000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