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가 실은 화물은 1만 4000명의 생명"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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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 참여 메러디스 빅토리호
마지막 미국 생존 선원 벌리 스미스 씨
18일 거제 철수작전 기념식 찾아 '눈시울'
당시 배에서 태어난 '김치 파이브'
은인과 만나 함께 기념비에 추도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해 작전 성공에 기여한 벌리 스미스 씨(가운데)가 18일 거제를 방문해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 헌화했다. 거제시 제공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해 작전 성공에 기여한 벌리 스미스 씨(가운데)가 18일 거제를 방문해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 헌화했다. 거제시 제공

“그때 우리가 실은 화물은 1만 4000명의 생명이었습니다.”

18일 오전 11시께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준비한 제19회 흥남철수 거제 기념식장에 푸른 눈동자에 흰머리가 성성한 노신사가 새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섰다.

한국전쟁 당시 2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과 장병 목숨을 구한 ‘흥남철수작전’ 현장에서 기적의 항해를 이끌었던 주역 벌리 스미스(96) 씨다.

흥남철수작전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군과 한국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을 탈출한 대규모 철수 작전이다.

세계 전사 기록상 가장 큰 규모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작전으로 꼽힌다.

연합군 선박 총 193척이 동원돼 중공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 한국 제1군단‧미국 제10군단 장병 10만여 명과 차량 1만 7000여 대, 피난민 10만여 명과 군수품 35만 t를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켰다.

이중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항구가 함락되기 전에 떠난 마지막 선박 중 하나였다. 길이 140m, 무게 7600t급 대형선이지만 군수 물자를 운송하려 투입된 탓에 정원은 60명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미국인 선원만 46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레너드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결단을 내렸다.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내린 뒤 그 공간에 피난민 1만 4000명 태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 23일 흥남항을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일간의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인 25일 ‘약속의 땅’ 거제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 이틀 만에 부산 오륙도 앞에 닿았지만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애초 부산항이었던 목적지가 중간에 거제 장승포항으로 바뀌었는데, 이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해 중 무려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선원들은 한국하면 가장 친숙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더해 이들에게 ‘김치 파이브(kimchi 1~5)’라는 애칭을 붙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일궈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지난 2004년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해 작전 성공에 기여한 벌리 스미스(가운데 오른쪽) 씨가 부인 바바리 스미스 여사와 함께 18일 거제를 방문해 제19회 흥남철수 기념식에 참석했다. 거제시 제공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해 작전 성공에 기여한 벌리 스미스(가운데 오른쪽) 씨가 부인 바바리 스미스 여사와 함께 18일 거제를 방문해 제19회 흥남철수 기념식에 참석했다. 거제시 제공

벌리 스미스 씨는 바로 이 메러디스 빅토리호 삼등 항해사로 마지막 생존 선원이다. 2018년 방한 이후 7년 만에 부인 바바라 스미스 여사와 함께 다시 거제시를 찾은 그는 메르디스 빅토리호를 형상화한 기념비 앞에서 감정이 북받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스미스 씨는 “당시 배 안에는 먹을 것은 커녕 물도 통역사도 없었지만 피난민 모두는 침착하게 잘 견뎠고 질서있게 생활했다”며 “하선 때 ‘이제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피난민들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먼저 떠난 선장과 동료 선원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국화꽃을 선물했다. 스미스 씨는 “1950년 12월 25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다. 미국으로 돌아갈 때 우리 모두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에 매우 기쁘고 행복했다”며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에 항상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김치 파이브 중 첫째인 손양영(74) 씨와 막내 이경필(74) 씨도 현장을 찾아 은인과 재회했다. 이들은 함께 추도의 뜻을 전하고, 스미스 씨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현재 거제시는 흥남철수작전이 보여준 인류애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장승포동 옛 여객선터미널 부지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2026년 3월 준공 예정이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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