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한 지하철로 둘러보는 아름다운 예술 여행 한 바퀴 [동유럽 미술관·박물관 기행]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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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미술관 전시품만 10만 점
라파엘로 등 13~18세기 작품 수두룩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홀은 필수 코스
옛 왕궁 부다성에 꾸며진 국립미술관
지역화가 역사 장면 담은 작품 대다수
‘천년 헝가리’ 흔적 담아낸 국립박물관
베토벤·리스트 썼다는 피아노도 인기

화려한 제단 장식으로 가득 찬 헝가리국립미술관 ‘중세 고딕식 제단의 방’. 왕궁이었던 이 미술관에서는 헝가리 역사를 담은 지역작가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 화려한 제단 장식으로 가득 찬 헝가리국립미술관 ‘중세 고딕식 제단의 방’. 왕궁이었던 이 미술관에서는 헝가리 역사를 담은 지역작가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
고색창연한 부다페스트 지하철역, 부다페스트미술관 전경과 헝가리국립박물관 전시품(위에서부터) 고색창연한 부다페스트 지하철역, 부다페스트미술관 전경과 헝가리국립박물관 전시품(위에서부터)
부다페스트미술관 로마네스크 홀. 부다페스트미술관 로마네스크 홀.

헝가리 부다페스트 최고 인기 명소인 뉴욕 카페 인근의 숙소에서 나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간다. 데악 페렝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면 회쇡역으로 이어진다. 헝가리 건국 영웅과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즐비한 회쇡광장(영웅광장)으로 연결되는 역이다.

1896년 개통한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이 섬나라 영국 런던을 제외하고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생긴 지하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량과 역사가 아직도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해 외국 관광객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끈다.

부다페스트 지하철은 수백 년간 이어진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헝가리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교통수단이다.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백 년 지배에 시달렸던 헝가리는 19세기 말 독립을 쟁취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독립에는 실패했지만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탄생시켜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부다와 페스트, 오부다 3개 지이 통합해 부다페스트라는 거대 도시가 탄생했고, 이후 반세기 동안 부다페스트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됐고, 경제 성장 덕분에 예술도 부흥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부다페스트의 모습이 형성된 것은 이 시기였다. 구불구불한 골목 같던 도로는 사라지고 시원시원하게 직선으로 쭉 뻗은 새로운 현대식 도로가 생겼다. 유럽에서 최초로 전기식 지하철이 안드라시 대로 지하에 건설된 것도 이때였다.

국회의사당도 건설됐고, 부다페스트미술관과 국립박물관, 오페라하우스 등 각종 문화시설과 극장, 뉴욕 카페와 카페 제르보 등 유명한 커피전문점은 물론 세체니 온천과 겔레르트 온천 등도 만들어졌다. 페스트와 부다 사이를 흐르는 두나강(도나우강의 헝가리어)에는 다리가 3개 건설됐다.

■부다페스트미술관

부다페스트에 여러 번 여행을 갔고, 그때마다 회쇡광장을 지나다녔지만 왼쪽에 선 건물이 헝가리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이곳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된 게 다행이었다.

부다페스트미술관 뒤편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찾았다는 부다페스트 최고 식당 ‘군델 카페 레스토랑’도 있으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군침을 삼킬 만하다.

부다페스트미술관을 방문하던 날 마침 ‘신과 악마의 왕국’이라는 주제로 메소포타미아 특별전이 진행 중이라서 인파가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입구가 다른 상설전시장 방문객은 그다지 많지 않아 느긋하게 입장해서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어떤 여행객은 블로그에 ‘부다페스트미술관에 투자한 세 시간은 정말 행복해서 마음이 붕 떠다녔다’고 기술했는데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전시품 규모가 10만여 점을 넘는 부다페스트미술관은 사실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박물관이다. 헝가리 및 유럽 여러 나라 작가들의 미술품뿐 아니라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각종 유물과 미술품을 전시한다. 부다페스트는 고대 로마 시대에 중요한 군사기지여서 많은 로마군이 주둔한 덕분에 당시의 유물이 많이 남은 편이다.

부다페스트미술관이 소장한 미술품 중에는 특히 13~18세기 작품이 많다. 14세기 이탈리아 화가 마소 디 방코의 ‘성모의 대관’,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일 사세타의 ‘기도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 17세기 스페인 화가 후안 안토니오 에스칼란테의 ‘성모 마리아의 수태’ 등 반드시 찾아봐야 할 작품은 차고 넘친다.

부다페스트미술관에서 빼먹지 말아야 할 공간은 또 있다. 과거에는 전시되지 않는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였지만 수리를 거쳐 중세 바실리카 성당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은 ‘로마네스크 홀’이다. 놀랍게도 홀을 찾는 방문객은 그다지 많지 않아 긴 시간 동안 혼자 출입문 앞에 서서 예수의 생애를 담은 벽화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국립미술관

회쇡역에서 다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점인 뵈뢰슈머르치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도보로 부다페스트 최초의 영구적 교량인 세체니다리를 건넌다. 19세기 헝가리 민족주의 정치인 세체니 이슈트반이 만든 역사적인 다리다. 아버지 세체니 페렝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폭풍우 때문에 배가 뜨지 못해 두나강을 건너지 못하게 된 걸 원통하게 여겨 국민 모금을 벌여 만든 시설이었다.

다리를 건너 미니열차 푸니쿨라에 오른다. 종점은 부다성과 어부의 성채, 마차슈대성당 등이 있는 부다페스트 여행의 중심지 부다지구다. 역에서 나가면 왼쪽의 부다성 정문에 칼을 든 대형 독수리 조각이 보인다. 896년 헝가리를 건국한 아르파드에게 새 나라를 세울 자리를 안내한 ‘신의 사자’라는 투룰이다.

부다성은 14세기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한 곳이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 보강을 거쳐 왕실 가족이 사는 왕궁이 됐고, 지금은 헝가리 예술가들의 작품 및 역사 작품을 전시하는 헝가리국립미술관으로 변신했다.

국립미술관은 원래 1957년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문을 열었지만 1975년 부다성으로 옮겼다. 왕궁에는 국립미술관 외에도 국립세체니도서관과 부다페스트역사박물관도 들어갔다. 그 덕분에 헝가리인은 물론 많은 외국 여행객이 찾는 인기 여행명소로 발전했다.

왕궁에 설치된 시설답게 헝가리국립미술관은 아름다운 공간을 자랑한다. 과거에는 ‘시씨’로 유명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엘리자베트 황후 등 왕실 가족, 귀족들이 드나들거나 살았을 방, 연회실, 사무실이 미술품을 전시하는 자리로 바뀐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정권 시절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데다 미술관으로 개조하면서 많이 고친 탓에 과거 왕궁의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국립미술관 매표소가 있는 0층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정면에는 벤주르 귤라가 그린 대형작품 ‘부다성 재탈환’이 걸려 미술관의 성격은 물론 전시작들의 경향을 알려준다. 역사를 담은 그의 작품은 이외에도 ‘마차슈 국왕의 개선’, ‘성 이슈트반의 침례’, ‘교황 사절을 만나는 마차슈’ 등 다양하다.

국립미술관에는 클로드 모네 등 외국 화가 작품도 있지만 헝가리미술협회 창립자인 바라바스 미클로슈, ‘단죄 받은 남자의 마지막 날’로 유럽에 헝가리 화단을 널리 알린 뭉카시 미하일리 등 헝가리 화가 작품이 대부분이다.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화가, 작품이어서 흥미를 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색적인 주제, 화풍을 감상한다는 측면에서 깊은 의미를 가진 곳이다.

국립미술관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가면 시씨가 정말 사랑했다는 아름다운 풍경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부다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언덕에 건립된 덕분에 두나강과 페스트지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을 제공하는 장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세체니다리와 국회의사당 낮 풍경, 야경은 ‘유럽 최고의 경치’로 손꼽힐 정도다.

■국립박물관

부다성 국립미술관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 다시 세체니다리를 건너간다. 데악페랭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헝가리 역사와 문화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헝가리국립박물관이 나온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립박물관 건설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세체니다리를 건설한 세체니 이슈트반의 부모 세체니 페랭과 페스테치츠 줄리아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중요한 두 랜드마크를 부모와 자식이 건설한 것이다.

세체니 페랭은 1802년 평생 수집한 각종 유물, 유산을 털어 국립세체니도서관을 설립했고, 아내 줄리아나는 많은 자연사 수집품을 기증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애국적 헝가리인이 각종 서적, 유물을 내놓았고, 이는 곧바로 헝가리국립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헝가리국립박물관은 지금도 세체니 패랭이 도서관을 세운 1802년을 창립연도로 인정한다. 오늘날 박물관 건물은 1832년 헝가리 국회는 국가 예산을 들여 새로 건설한 것이다.

헝가리국립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고대 로마, 896년 아르파드의 건국을 거쳐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현대에 이르기까지 헝가리 역사를 각종 자료와 유물로 소개하는 공간이다.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독특한 유물은 이곳이 과거 번성했던 지역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의 각종 은 세공품으로 이뤄진 ‘서소 보물’에서부터 11세기 비잔틴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 모노마쿠스 황후를 새긴 ‘모노마쿠스 왕관’ 등에 이르기까지 진귀한 보물도 가득하다.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작곡가 베토벤과 리스트가 이용했다는 피아노도 인기 전시품이다. -끝-

글·사진/부다페스트(헝가리)=남태우 기자 leo@busan.com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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