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만휴정의 기적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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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는 ‘만휴정’(晩休亭)이란 정자가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인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김계행은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을 알렸는데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정자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돼 있다. 만휴정은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드라마 속 인물인 유진초이(이병헌)가 고애신(김태리)에게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라고 고백한 곳이 만휴정 앞 다리다.

만휴정이 역대 최악의 산불 사태에서 기적적으로 버텨내 화제다. 지난 25일 만휴정 주변 산림이 온통 화염으로 뒤덮이자, 방재 인력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철수에 앞서 만휴정 기둥은 물론 정자 아래까지 촘촘히 방염포를 덮고 물을 뿌려 놓았다. 국가유산청이 다음날 만휴정 일대를 확인했더니 다행히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만휴정이 1000도 화마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의 천’인 방염포 덕분이었다. 방염포는 면 직물에 방화 성능을 지닌 특수재료를 함께 짜 넣은 천이다. 화재 때 불길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주로 산업·공공시설에 안전용으로 비치된다. 이걸 씌우면 많게는 1000도 넘는 열을 막아주고, 불이 닿아도 일정 시간 타지 않고 견디게 해준다. 국가유산청은 2023년 충남 홍성군 산불 때 조계종 사찰 고산사를 방어하기 위해 방염포를 처음 도입했다. 이번 산불 사태에서 방염포가 문화유산을 화마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안타깝게도 천년 사찰인 경북 의성 고운사의 국가지정 보물인 연수전과 가운루는 전소되고 말았다. 반면, 고운사의 삼층석탑은 방염포로 꽁꽁 싸맨 덕분에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국가유산청은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 등 주요 사찰과 국보·보물 등에도 방염포 처리를 했다.

많은 국가유산이 이번에 ‘역대급 불지옥’을 피하지 못하고 피해를 보았다. 국가지정 보물 2건, 명승 3건, 천연기념물 3건, 민속문화유산 3건, 시·도지정 19건 등 총 30건이 전소되거나 일부 소실됐다. 우리나라에는 특히 목조 재질의 국가유산이 많아 화재에 취약하다. 방염포 사용 매뉴얼 마련, 사찰 주변 산불 대응 장비·시설 설치 등 국가유산 방재 체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국가유산을 화마로 허무하게 잃는 아픔이 더는 없어야겠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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