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주민과 함께하는 '필드 트립'서 입주 작가도 영감 [창작공간 넘어 플랫폼으로]
③ 대만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무허가 주택 난립하던 언덕마을
철거 갈등 겪다 예술촌으로 변신
해마다 예술가 50여 명 작품활동
원주민 가구·지역과 활발한 교류
주변 상권까지 전시 공간 확대해
작가 성장·지역 활기 동시에 도모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THAV) 골목길. 골목을 따라 열여섯 가구의 원주민 주택과 작가 스튜디오가 이어진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THAV) 입구. 입주 작가 스튜디오와 갤러리 위치를 보여 주는 안내도가 붙어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대만 수도 타이베이 남부 공관(公館) 지역에 자리 잡은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THAV). 타이베이를 둘러싸고 있는 신베이시(서울-경기도처럼) 사이에 흐르는 신뎬천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마을로, 겉모습으로는 부산의 감천문화마을과 닮았다. 이곳은 타이베이문화재단이 관리하는 16개 산하기관 중 예술가 입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표 기관이다. 마을 입구에 보장암(寶藏巖)이라는 사찰이 있어 '보장암국제예술촌'으로도 불린다.
특이하다면 빌리지 안에 예술가들이 생활하고 작업하는 공간과 일반 주민들의 거주지가 한데 어울려 있다는 것이다. 전시회와 축제 등 일 년 내내 이어지는 THAV의 연간 계획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거주 형태만 모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금은 예술과 일상의 공존 모델처럼 됐지만, 이런 과정에는 아픈 현대사가 함께하고 있다. 이 역사가 바로 오늘날 THAV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또 한 가지 THAV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들의 공존과 협력이 단순히 빌리지 안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은 인근 학교 학생들과 연계 수업으로 이어지거나 상권과 연계한 갤러리 운영과 거리 전시회로도 확산하고 있다.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초입에 있는 마을 기록관 내부. 초창기 원주민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영상(왼쪽 벽면)과 함께 천장의 '공생 부락'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7~8월 두 달간 진행되는 2025 시즌 두 번째 전시 중 하나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저항과 합의가 만든 ‘공존 모델’
THAV가 형성된 곳은 지형상 강을 끼어 있고 예부터 물을 구하기 쉬웠다. 또 고지대에 위치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연스레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차지했고, 해방 후에는 도시 빈민과 퇴역한 대만 군인 출신들이 몰려들면서 무허가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80년대 들어 도시 정비에 나선 타이베이시가 이곳을 재개발하겠다며 철거에 나서면서 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주민 시위대와 공권력이 충돌하면서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마을 인근의 국립대만대학교 학생과 교수 등 지식인과 시민 단체가 주민들의 보존 캠페인에 힘을 보태면서 예술촌 형태로 거듭나는 길이 열렸다. 시가 철거 방침을 철회하면서 원주민들도 시 당국의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마을은 2004년 역사지구로 지정되고 2010년 원주민과 예술인 창작촌이 공존하는 형태의 THAV가 공식 출범했다.
THAV에는 모두 서른다섯 개의 입주 작가 스튜디오와 열두 개의 갤러리가 있다. 또 두 개의 리허설룸과 한 개의 다목적 공간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을 거점으로 해마다 50명 이상의 국내외 예술가가 창작과 교류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빌리지를 구성하는 한 축인 원주민 열여섯 가구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현지에서 기자를 맞은 엘리샤 슈 THAV 매니저는 마을 입구의 작은 갤러리부터 안내했다. 일종의 마을 기록관 같은 곳으로, 벽면 스크린에 초창기 마을에 정착한 원주민들의 생활상이 영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 매니저는 “THAV 출범이 가능했던 ‘공생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설명했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정신을 잘 구현한 공간인 셈이다. 갤러리 천장에 달린 패널에는 ‘공생 부락’이라는 문구가 구호처럼 적혀있었다.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전경. 예술촌이 들어서기 전부터 거주하던 원주민과 입주 작가들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다. THAV 제공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장위한(왼쪽부터) 디렉터와 엘리샤 슈 매니저가 전시회 등 해마다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THAV 제공
■세계로 뻗어가는 대만의 예술 외교
THAV에 머무르며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크게 세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이들이다. 가장 활발히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 기관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교류 프로그램이다. THAV는 현재 아시아 각국 기관은 물론이고 유럽과 캐나다, 호주와도 협약을 통해 아티스트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도쿄의 토카스 레지던시, 요코하마의 뱅크아트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또 태국의 대표적인 예술대학인 방콕 실파콘대학(Silpakorn Univ.)과도 협정을 맺고 회화와 조각, 그래픽 전공자들의 레지던시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이미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부산문화재단의 홍티아트센터, 고양시의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에 더해 최근엔 대구문화예술진흥원과도 MOU를 맺고 예술인과 콘텐츠 교류, 공동 사업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홍티아트센터와는 3년 전부터 작가 레지던시 교류를 해오고 있다. 지난해 가을 3개월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나미아 작가는 홍티아트센터 입주작가(2022년) 경험이 THAV 레지던시로 이어진 경우이다. 나미아 작가는 THAV가 올해 처음 추진하는 ‘공관거리예술제’ 작가로 초청받아 최근 다시 이곳에 머물며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파트너십을 교류 프로그램 말고도 공모로 입주작가를 선발하는 ‘오픈 콜’ 프로그램이 있다. 매년 3월 시작되는 오픈 콜은 개인이나 THAV와 교류 관계가 없는 기관에서 비용을 자부담하는 조건으로 응모하고 선발되는데, 인원은 해마다 30명 정도이다. THAV 누리집에는 그동안 예술촌을 거쳐 간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출신 국가 수가 40개국을 넘는다.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마이크로 로프트 레지던시’로, 장기 거주할 자국(대만) 작가를 대상으로 선발한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50명이 넘는 작가가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THAV의 적극적인 국제교류 행보는 단순히 작업실과 주거 공간 제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 단위 문화재단이 운영하지만, 그 도시가 한 국가의 수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예술을 통한 국제외교라는 측면도 분명 가미된 정책으로 보인다. THAV 운영을 총괄하는 장위한(長玉漢) 디렉터는 “해외 예술가를 교육하고 양성시켜서 그들이 자국에 돌아가 우리 시스템이나 경험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중동과 남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를 예로 들기도 했다.
타이베이 지하철 MRT 공관역 인근의 스이위엔시장. 걸어서 15분 거리의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가 9월 개최하는 공관거리예술제의 거점이자 출발지이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타이베이 지하철 MRT 공관역 인근 스이위엔시장 2층에 마련된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전시 공간. 입주 작가들의 비주얼 아트 작품이 상시 전시되고 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거주’를 넘어 ‘교류’하는 레지던시
THAV의 교류는 사실 지역 내에서 더 활발하다. 국제교류의 씨앗이 지역에서부터 움트고 있는 것이다. THAV의 2025년 연간 행사 계획표를 보면 1월부터 12월까지 빈칸이 하나도 없다. 4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두 달씩 4차례 진행하는 시즌 전시회, 9월에 열리는 연례 콘퍼런스, 6월과 11월 각 한 달간의 여름·겨울 오픈 스튜디오에 해마다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간은 트레저힐 빛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간 3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THAV를 찾고 있다. 여기에 올해는 9~10월 두 달간 펼쳐질 ‘공관거리예술제’가 추가된다.
7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이 행사는 THAV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MRT 공관역(걸어서 약 15분) 주변 상권과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진행된다. 예술촌을 나와 공관역의 스이위엔(水源)시장에서 THAV까지 이어지는 거리 곳곳에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 지역과 함께하는 예술촌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장위한 디렉터는 "레지던시 시설이 지역에 예술의 향기를 더하면서 상권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추진하게 됐다"고 배경 설명을 했다.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에 머무르고 있는 나미아(오른쪽) 작가가 9월 공관거리예술제에 선보일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구상하던 배 재료를 이곳에서 익힌 기술 덕분에 나무로 바꿨다고 말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에서 작업 중인 리지 문 작가가 9월 공관거리예술제에 출품할 작품의 설치 장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리지 문 작가는 뒤쪽의 아파트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예술제에 초청받은 작가 7명 중 2명이 한국인이다. 앞서 얘기한 나미아 외에도 티칭 아티스트인 리지 문도 함께한다. 식물에서 직접 추출한 물감으로 작품을 만드는 리지 문 작가는 지난해 입주작가를 하며 좋은 인상을 받아 초청됐다. 리지 문 작가는 스이위엔시장 뒤편 서민 아파트 앞 공터에 작품을 설치, 아파트를 배경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THAV는 시장 안 점포 2곳에도 자체 전시실을 마련해 비주얼 아트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공관거리예술제가 단번에 성사된 것은 아니다. 바탕에는 THAV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자리하고 있다. THAV 입주작가는 12주간의 체류 기간 중 절반이 넘는 8주를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가장 핵심은 ‘필드 트립’이다. 일종의 현장 학습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작품 창작에 앞서 지역과 연결고리를 만드는 기회를 얻는다. 작가들은 이 기간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다른 기관은 물론이고 지역민들과도 자연스럽게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곧잘 작품 창작에 반영되기도 한다. 나미아 작가는 예술촌 아래 강가에서 체험학습하는 학생들의 카약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제작법을 배워 거리예술제 출품작 소재를 플라스틱에서 나무로 바꿨다. 천연물감을 만들어 쓰는 리지 문 작가는 식물학 박사인 인근 초등학교 교장의 초청으로 매주 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타이베이 트레저힐아티스트빌리지 초청으로 각각 두 번째 레지던시를 하고 있는 한국인 작가 리지 문(왼쪽)과 나미아. 입주 작가와 지역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필드 트립 같은 프로그램이 부산에서도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타이베이 트레지힐아티스트빌리지 장위한 디렉터가 9월 예정된 공관거리예술제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타이베이(대만)=김희돈 기자
부산의 홍티아트센터(나미아)와 또따또가(리지 문)를 경험한 두 작가 역시 필드 트립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이들은 부산의 레지던시 시설과 THAV의 역사와 입지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부산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중요한 것은 의지”라며 “이는 레지던시 운영기관이나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창작자로서도 새로운 눈을 뜨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장위한 디렉터는 “THAV의 궁극적 지향점은 대만을 넘어 아시아 예술의 허브가 되는 것”이라면서 “지역의 미술관 기능과 지역 경제 활성화가 중요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부산일보사·부산문화재단 공동기획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