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음식으로 도시재생 이끈 고성호 건축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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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부산 건축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지역을 위주로 활동하는 고성호 건축가(PDM파트너스 대표)가 2025년 제49회 세계건축상(World Architecture Awards)에서 국내 건축가 최초 세 작품 동시 수상이라는 독보적 성과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세계로 약진하는 K컬처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던 K건축의 위상을 지역에서 단숨에 끌어올린 쾌거였다. 수상작 ‘칠암사계’와 ‘선유도원’은 부산, ‘성림목장’은 경남 양산에 위치해 모두 쉽게 가볼 수 있다는 점도 반가웠다.

그런데 수상작 세 작품이 모두 카페 건물이라는 사실이 기자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고 건축가가 2010년 수영강변에 엘올리브라는 레스토랑을 열어 직접 운영할 때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건축과 음식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건축과 음식으로 민간 주도 도시재생까지 성공시켜 온 고성호의 특별한 이야기를 전한다.


고성호 건축가는 2025년 제49회 세계건축상에서 국내 건축가 최초로 세 작품 동시 수상했다. 고성호 건축가는 2025년 제49회 세계건축상에서 국내 건축가 최초로 세 작품 동시 수상했다.

고 건축가가 이끄는 PDM파트너스는 2004년 수영강변에 지금의 사옥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수영강 악취가 너무 심해 ‘똥물’이란 소리를 들을 때였다. 수영비행장 자리였던 강 건너편은 허허벌판이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센텀시티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왜 거기다 사옥을 짓느냐고 다들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수영강이 언젠가는 맑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선진국의 강들이 그렇게 변해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수영강변에 관심이 없을 때 그는 주변 땅을 야금야금 사 모았다. 가만두면 여기도 아파트 단지로 바뀔 텐데, 그걸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크리에이티브센터·엘올리브·행복한느림보 등 8개 건물이 만들어져, 지금은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활기찬 골목이 되었다. 고 건축가의 선견지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

인접한 고려제강 관계자들이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믿음이 가자 자문을 청해온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멋진 이웃이 F1963이다. F1963은 도서관, 서점, 갤러리, 카페, 공연장, 야외정원 등을 갖춘 부산의 자랑스러운 문화공간이다. 어쩌면 아파트 단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땅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F1963은 2028년 세계디자인수도로 지정된 부산의 콘텐츠 중심 지역 개발 사례로도 관심을 끌고 있다.


어촌마을 칠암에 자리 잡은 ‘칠암사계’. PDM파트너스 제공 어촌마을 칠암에 자리 잡은 ‘칠암사계’. PDM파트너스 제공

좋은 소식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콘텐츠에 배가 고픈 F1963은 아래쪽으로 추가 문화공간을 만들면서 내려오고 있다. 고 건축가가 가진 나머지 부지는 F1963 방면이어서 반대로 올라가고 있다. “언젠가는 두 지역이 만나지 않을까요?” 그는 비슷한 색깔을 이어가다 보면, 그림이 완성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 주도의 독특한 도시 재생 구역이 완성되는 날을 하루빨리 보게 되면 좋겠다.

PDM파트너스 사옥에선 수영강이 내려다보인다. 고 건축가는 예전부터 “수영강 다리를 지금보다 좀 높게 지었으면 수영강이 요트 천연 계류장이 될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라고 했다. 수영강은 바다가 아니어서 태풍이 불어도 파도가 없고 늘 잔잔한 곳이다. 수영강에는 언제나 안전하게 요트를 계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각양각색의 요트 돛대가 즐비한 수영강의 모습을 생각해 봤다. 시민들이 집 앞에서 자가용 요트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쳐다만 보는 강에서 이용하는 강으로 바뀌면 삶의 질은 달라진다. 수영강에 천연 요트 계류장이 만들어졌다면, 수천억 원의 예산이 드는 수영만 요트경기장 재개발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조금 큰 요트들은 돛이 다리에 걸려 들어올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가 이전부터 이 이야기를 무수하게 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앞을 내다보는 건축가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밥을 할 때도 뜸이 들어야하듯이 건축에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수영강 상류 회동 수원지 앞에 자리한 ‘선유도원’. PDM파트너스 제공 수영강 상류 회동 수원지 앞에 자리한 ‘선유도원’. PDM파트너스 제공

음식 이야기로 넘어갈 때가 된 것이다. 고 건축가는 처음엔 “건축과 요리가 똑같다”라고 말하다, 나중에는 “이 둘이 다르지가 않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건축과 요리는 재료가 가진 물성(物性)을 굉장히 많이 따진다. 그는 건축할 때 돌이든 콘크리트든 원래의 물성과 질감을 그대로 살려내는 작업을 주로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동양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태도를 건축에 녹여내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해 온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리에서도 최소한의 가공법을 통해서 그 식재료가 가진 본질의 질감과 맛을 살려내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플레이팅도 물성을 살리기 위해 잘지 않게 ‘매스(mass·덩어리)’ 중심으로 담는다.

그는 산초를 예로 들면서 건축과 음식이 다를 게 없다고 설명했다. 부산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먹어 왔기 때문에 산초가 입에 잘 맞다. 하지만 산초를 안 먹어본 외지 사람들이 먹기는 힘들다. 부산 음식이 좀 짜다는 이야기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먹어 왔기 때문에 그게 간이 맞는 것이다. 부산 음식을 서울 사람들은 짜다고 느끼는 게 지역성이다.

건물도 똑같다. 산에 짓는 집과 바다 근처에 짓는 집은 달라야 한다. 서울에 있는 건물을 부산에 옮겨 놓으면 얼마 못 가서 녹이 슬고 엉망진창이 되기 쉽다. 바닷가에 들어서는 건물은 염분으로 인한 산화나 부식 문제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설계 단계에서부터 달라야 한다. 그가 “지역에 있는 건축은 지역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금정산 자락의 폐목장을 재생한 ‘성림목장’. PDM파트너스 제공 금정산 자락의 폐목장을 재생한 ‘성림목장’. PDM파트너스 제공

어촌마을 칠암에 지은 ‘칠암사계’와 수영강 상류 회동 수원지 앞에 자리한 ‘선유도원’에는 진작에 다녀왔다. 수상 소식 이후 금정산 자락의 폐목장을 재생한 ‘성림목장’까지 가 봤다. 부산은 산, 바다, 강에 온천까지 품은 사포지향(四抱之鄕)의 도시로 불린다. 수상작들은 각각 바닷가, 호수, 산이라는 부산의 지역성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모두 인구 소멸 위기 지역에 들어섰다는 공통점도 지녔다.

특히 칠암사계는 소멸 위기에 처했던 어촌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은 성공작으로 꼽힌다. 그가 처음 현장을 찾았을 때는 빈집과 노후 상점들이 방치된 상태였다. 칠암사계는 이제 연간 80만~9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지역 명소가 되었다. 칠암 마을의 빈집에는 불이 켜지고, 아기를 업은 젊은 부부들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건축이 지역 사회의 재생과 공동체 회복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카페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데다 일자 라인으로 이어져 있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삼사순례 같은 필수 순방 코스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 가득한 집> 등을 발행하는 디자인하우스는 ‘프로퍼티 디자인 최고위 과정’에 고 건축가의 강의와 현장 순례 코스를 정식으로 집어 넣었다. 그는 “그동안 건축을 보러 서울로, 때로는 외국으로 나가면서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우리 건물을 보러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버스를 전세해서 우리 건물을 보기 위해 오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기쁜 일이다”라고 말했다.


고성호 건축가는 2025년 제49회 세계건축상에서 국내 건축가 최초로 세 작품 동시 수상했다. 고성호 건축가는 2025년 제49회 세계건축상에서 국내 건축가 최초로 세 작품 동시 수상했다.

고 건축가는 영국 런던 예술대학에서 건축, 디자인 매니지먼트를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 미술대 대학원에 공간디자인 외래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세계 건축상 수상 기사에서는 그가 건축 비전공자이자 독학으로 건축에 입문했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알고 보니 공업계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40년 가까이 건축을 해왔다. 그래도 대학교 학부에서 건축을 전공하지 않으면 건축계에서는 비전공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에게 건축은 아주 일부일 수도 있다고 했다. 환경에 맞는 건축과 조경부터 시작해, 건물 안에 놓이는 가구, 심지어는 빵 모양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콘텐츠를 종합적으로 다뤘기 때문이었다. PDM파트너스, 모든 사물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보는 디자인 회사라는 설명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실 그도 건축가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을 더 많이 사용했다.

수영강변에 아파트 단지만 즐비했다면 삭막해서 어쩔 뻔했나 싶다. 원래 있던 골목과 오래된 공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부산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 “외로워지면 깊어진다”라고 그가 툭 던진 말이 떠오른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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