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인간이란 왜 이렇게 공동(空洞)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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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김정한창작상 수상 정재운 소설가
요산김정한문학상 <희주> 읽고 감상평
지역 선후배 작가의 '건강한 연대' 느껴

올해 요산김정한문학상에 선정된 박향 소설가의 장편소설 <희주> 표지. 올해 요산김정한문학상에 선정된 박향 소설가의 장편소설 <희주> 표지.

올해 요산김정한창작상 소설 부문 수상자인 정재운 소설가가 올해 요산문학상 수상작인 <희주>를 읽고 저자인 박향 작가에게 솔직한 감상평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부산 지역 문단의 선후배 작가로 서로의 작품을 평가하며 창작 의지를 높인다는 건 지역 문단이 가진 건강한 생태계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특히 두 작가는 존경하는 요산 선생님의 이름으로 받은 상이기에 더욱 특별한 기쁨과 동시에 앞으로 작품 활동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정 작가는 부인과 번갈아가며 <희주>를 읽었고, 자신들이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대화를 하며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특히 대학병원 소아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던 아내는 현재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언젠가 소아 호스피스 병동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투병과 죽음을 매번 보며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희주>를 통해 다시 현장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정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대체 인간이란 왜 이렇게 공동(空洞)을 견뎌내지 못하는가’를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복수가 아니라 나답지 않음으로 나를 회복하는 그 역설의 의지가 역전 홈런처럼 다가왔다는 말로 감동을 표현했다.

올해 요산김정한창작상 소설 부문 수상자인 정재운 소설가. 부산일보DB 올해 요산김정한창작상 소설 부문 수상자인 정재운 소설가. 부산일보DB

다음은 정재운 작가의 <희주> 감상 편지글 전문이다.


선생님의 귀한 작품을 받고, 느리게 읽어온 지난 몇 주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저의 처도 함께 읽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 읽고 다른 사람이 차례를 기다려 읽는 식이 아니라, 한 권을 놓고 번갈아가며 읽었습니다. 얼른 상상이 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각자 수행해야 하는 생활이 있기 때문에 단번에 읽어낼 시간적 여력은 확보가 안 되니 아이를 재운 열 시부터 삼십 분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삼십 분.. 그렇게 저희는 열한 시나 되어야 읽기를 그치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곤 밤늦도록 옛 기억들을 끄집어내 한참 얘길하곤 했습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아내였고, 저는 들었습니다.

아내는 대학병원의 소아과 중환자실(그곳에는 소아암과 백혈병 환자가 90%였습니다) 간호사로 7년간 일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해 육체적으로 가장 젊었던 날들을 병원에서 보낸 것이죠. 그 친구에게 죽음은 또래보다 언제나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십 줄에 도착한 처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장으로 돌아갈 계획은 언제나 품고 있었나 봅니다. 육체적으로 더 쇠약해지기 전에(아내는 육십은 결코 넘기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떠나 소아 호스피스 병동에 재취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자기 인생의 플랜도 최근 <희주>를 읽고 난 감상을 두서 없이 나누는 동안에 듣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일과에 함몰된 부부가 얼마나 대화가 부족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이번 읽기는 아이를 키우면서 애써 물리치며 살았던 지난 기억('아픔', '트라우마' 같은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치열한 병원 생활, 투병, 간절함, 그리고 이를 좌절시키던 숱한 죽음의 그림자)들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기억과 이야기는 마르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실로 끝을 모르고 풀려 나왔습니다. 그게... 지난 몇 주간 우리 부부를 거실 테이블에 앉히게 했음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정말이지, 새학기가 시작되어 피곤에 절은 상태조차 그녀를 멈추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케이스'라는 영단어로 요약되는 뭇 아이들이 얼마나 많던지... 그 아이들의 부모들의 삶들은 또 어떻고요... 그녀의 기억은 불필요할 정도의 세부까지 생생해서 듣는 것조차 여간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몫이라는 생각에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여기서 더 덧붙이면 사족이 되겠지요? 지금껏도 작품과 관계없는 췌언을 늘어놓았다는 생각입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내가 수행한 초월 읽기, 과도한 기억 불러오기가 작품 <희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마 작품을 쓰신 선생님조차 모르실 작품의 힘에 대해 저는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몇 자 감상을 적고 있는 지금의 저는 기대해봅니다. 지난 몇 주간의 대화가 아내를 보다 가벼웁게 만들어줄 거라고. 연애시절과 결혼생활을 통과하며 이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이지만, 문득문득 공허한 표정을 짓곤 하던 그 얼굴, 스스로는 설명할 수 없던 음울한 기분들에 대해서 이제는 알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걸 알고도 다시 현장을 돌아가겠다고 하는 모습이 마치 저의 졸고인 ‘경이로운 동그라미’에 나오는 인물, 심현철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저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기에 저희 둘은 그렇게 닮음을 확인한 셈입니다.

선생님, 이제 '기억'과 '죽음'처럼 지금 이곳으로부터 떨어진 얘기가 아니라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제게 <희주>는 소박한 물음 하나를 제기했습니다.

'대체 인간이란 왜 이렇게 공동(空洞)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소박하다고 했지만, 분기에 찬 물음이었습니다. 작품 속 희주의 모친은 희주의 딸 유미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을 통해 희주를 살게 하였습니다. 그게 다 병증의 결과이겠지만.. 정말이지 지독하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는 왜 첫딸의 죽음이라는 공동을 다른 생명으로 채우려 들었단 말인가. 그 어둠을, 빈자리를 빈 채로 내버려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한계일까, 하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채우고 들었습니다. 왜 인간들은 새로운 기억을 덧대어 구멍을 보이지 않게,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할까요.. 그 구멍의 자리는 그대로 둔 채, 그 구멍의 외연만을 껴안은 채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케이스는 없을까.. 저는 이 같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해봤습니다.

주선영 씨도 갑작스러운 연인의 죽음에 마땅한 소이를 찾으려 들었지요. 가지런한 인과의 사슬을 엮어내지 않고는, ’탓‘을 하지 않고는 그 공동을 메울 수 없기에, 선영은 희주를 미워하게 되었었었죠.

선생님, 저는 보편적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어떤 존재를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망실되고 이지러진 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인간. 언제까지나 그 공동을 담담히 직시하며 결코 기억에서 잊지 않는 인간 말입니다.

선생님, 몇 해 전, 인상 깊게 읽은 소설 중에 권여선의 <레몬>이 있습니다. 그 소설 속엔 살인사건에 희생된 언니가 있고, 그 언니를 대신해 그녀처럼 성형수술을 하는 여동생이 나옵니다. 한술 더 떠 모친은 동생의 이름을 언니의 이름과 유사하게 바꿉니다.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혜은‘이라는 언니의 이름처럼 ’혜언‘으로 바꾸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상실로 인한 공동을 메우려는 남은 자들(유족)의 시도가 그려집니다. 그리고 소설가들은 이 시도들, 행위들로 인한 비극으로 이야기를 직조합니다.

선생님, 혹시 저 소설을 읽으셨는지요. <레몬>이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아시나요? 언니를 죽인 자가 낳은 자녀를 유괴하여 대신해 키우는 것으로 복수를 완성합니다. 그들에게도 깊숙한 공동을 심어주고, 자신들의 공동을 그렇게 메운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소개한 줄거리를 통해 해당 작품의 주제의식을 납작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 소설 속에서 작가는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 진짜 신,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희주>를 볼까요. 암에 걸린 중년여성 희주는 그토록 오래 품어온 아픔 즉, 자신이 어떤 공동을 메운 대체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기 위해 <레몬>의 인물들처럼 타자에게 공동을 심어주는 방식의 복수를 택하지 않습니다. <희주>에서 그 공동을 심은 가해자는 단순한 악의에 의한, 개인화된 악이 아닙니다. 어린 희주를 죽게 내버려둔 모친의 잘못은 남편의 폭력이 야기한 것이었으며, 남편 역시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 탓에 그 모양이 되어버린 것으로 그려지죠. 따라서, <희주>에서 유일하게 복수를 할 만한 주체(암에 걸린 희주)는 악을 벌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하는 일이란, 아기 희주의 뼈를 뿌린 그 강물에 아이스크림 묻은 손을 씻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일이죠. 더듬고 이모에게 물어 그곳으로 찾아간 희주는 무엇을 할까요. 해원을 합니다.

유미의 개인전은 어떻고요. 작품 속 그녀는 평면회화 전공자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만, 그녀는 이전에 그녀가 (잘)해오지 않았던 설치를 택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유미 역시 외할머니로부터 '희주'라 불리며 타자의 대체물로 존재했었던 것을 떠올리면 복수를 택하지 않고, 본래적인 나(라고 믿어왔던-평면회화)를 포기하고 비본래적인 나(설치미술)를 통해 자신과 희주, 그리고 죽은 희주의 해원까지 가 닿으려는 그 의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대단한 감동을 던지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나답지 않음으로 나를 회복하는 그 역설의 의지가 역전 홈런처럼 느껴졌달까요.

선생님, 자꾸 남의 작품을 끌어들여 <희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참 모자란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나 써버렸는데.. 무슨 흉허물이 더 되랴 생각해봅니다. 작품 <레몬>이 인과의 서늘함을 새삼스레 들추어내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면, <희주>는 그 공동을 메우려는 인간 존재의 연민과 그럼에도 인과의 사슬에 묶이지 않는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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