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투병에서 건져올린 어느 노학자의 혜안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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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사랑하는 당신에게>
언론학자 강상현의 시산문집


10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메모.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던 아내의 소망을 대신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헬스장에서 체력도 키우고, 서울 둘레길에서 모의훈련도 했다. 그런데 아뿔싸…. 출발을 두 달 앞두고 신우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악몽 같은 현실에 잠을 못 이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다 명동성당을 찾아 눈물의 고해를 했다. 항암 치료와 수술을 받았지만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암이 전이됐다는 것이다. 자녀와 손자들은 눈물을 쏟았지만 저자는 마음을 다잡는다.

동아대와 연세대에서 후학을 가르쳐온 언론학자 강상현이 삶의 고비 고비를 겪으며 성찰한 지혜를 담은 <사랑하는 당신에게: 함께 걷는 길 위에서>를 냈다. 수필과 시로 구성된 시산문집이다. 시와 산문을 같은 제목으로 각각 나란히 써서 엮는 새로운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저자는 늘 밝고 유쾌하며 다른 이들을 돕길 좋아한 아내가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집 5형제 중 맏이인 스스로를 ‘나무꾼’이라 부르고, 자신과 결혼한 아내는 ‘선녀’라 여긴다. 아내의 10주기를 맞아 투병 중임에도 글쓰기에 몰두해 책을 만들어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으며, 음식을 자유롭게 먹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김치찌개를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을 소망하며 하루하루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지나온 과거도 생생하게 회상한다. 경남 진주에 살던 가족들은 ‘집안이 망하면서’ 서울의 판잣집으로 옮겼다. 뒤늦게 서울에 합류해 단칸방 살이에 충격 받은 까까머리 중학생은 “이기 우찌된 겁니꺼? 말도 안 돼예!”라며 마당에 주저 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콩나물 버스’에 가방만 빨려 들어간 채 버스가 떠나버려 발만 동동 굴렀다. 이 사건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서 대학입시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됐다.

술자리에서 웃음을 줄 수 있는 건배사를 고민하고, 나이 들어 취미 생활과 운동을 하며 자식 덕을 보지 않겠다며 ‘독립 만세’를 외치지만 은연중 자식들의 존재를 깨닫는다. 중증 환자로 지내며 그가 가장 많이 느낀 건 감사함이다. 회복을 기원하는 가족과 친구·지인, 기도해 주시는 신부님, 애써주는 의료진, 치료비 부담을 줄여준 나라까지.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고통을 신이 지워 주셨다고 말한다.

수술 뒤 오히려 상황이 악화돼 4기암 환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최악의 순간에도 “유레카!”를 외친다. “이제 나에게 새로운 시간이 온 것”이라며 고난의 또 다른 의미와 축복을 발견한다.

절망적인 상황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희망을 품어온 덕택일까. 암 진단 1년 만에 의사로부터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신부님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덕담했다. 담담한 고백이 깊은 울림을 준다. 강상현 지음/요세미티/288쪽/2만 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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