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사각 무연고 장애인] 2. 대책 없는 ‘탈시설 정책’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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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면 곧장 정원 감축… 홀로서기 실패 땐 ‘돌아올 수 없는 시설’

탈시설 이후 자립 훈련을 받고 있는 부산의 한 체험홈 거주 장애인들. 최근 장애인들의 시설 밖 자립 등이 적극 추진되고 있지만, 부족한 인프라 등으로 탈시설에 실패할 경우 돌아갈 곳이 없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busan.com 탈시설 이후 자립 훈련을 받고 있는 부산의 한 체험홈 거주 장애인들. 최근 장애인들의 시설 밖 자립 등이 적극 추진되고 있지만, 부족한 인프라 등으로 탈시설에 실패할 경우 돌아갈 곳이 없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busan.com

아동양육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로 자립을 선택한 무연고 장애인들은 사실상 추적 시스템이 없는 탓에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다. 더불어 타 장애인 시설에 입소한 무연고 장애인들도 ‘안전지대’에 있는 게 아니다. 동향원 등 일부 문제 시설이 무연고 장애인을 학대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일도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최근 장애인 복지계는 ‘탈시설’ ‘시설 소규모화’를 추진 중이다. 장애인들에게 자기 선택권을 주고, 밀착 케어가 가능토록 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 없이 추진되는 탈시설 탓에 무연고 장애인들이 오히려 막다른 길에 내몰리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한 번 나가면 돌아갈 수 없어 떠도는 ‘난민’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일터에서 갖가지 차별과 학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더라도, 이들을 위한 격리·보호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장애 정도 상관없이 원하면 퇴소

부산 5년간 총 87명 시설 나가

인권 향상 위해 시설 소규모 추세

정원 줄여 사실상 복귀 불가능

“탈시설 방향 좋지만 여건 부족”

단기거주시설 서울 39·경남 12곳

부산은 2곳 그쳐 전국 꼴찌 수준

■가로막힌 ‘시설 복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탈시설 장애인 수는 최근 3년간 2449명이다. 2015년 859명, 2016년 853명, 2017년 737명으로 매년 수백 명의 장애인이 체험홈 등 자립 준비시설을 떠나 ‘자기 삶’을 찾아간다. 부산에서는 지난 5년간 모두 87명이 탈시설했다. 현재 탈시설은 장애 유형, 중증 정도 등에 상관없이 장애인 본인이 원하면 가능하다. 시설 안에서 매뉴얼적인 삶을 살았던 장애인에게 ‘자유의 삶’이 주어지는 기회여서 많은 장애인이 탈시설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탈시설 정책엔 ‘출구전략’이 없다. 취업 이후 몸 상태가 악화되거나, 비장애인의 학대로 일을 그만둬 ‘홀로서기’에 실패했을 땐 이전에 거주하던 장애인 시설로 돌아올 수 없다. 탈시설, 시설 소규모화 추세에 따라 시설에서 퇴소 이후 곧바로 정원을 감축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복지계 관계자는 “지역의 님비 현상과 예산 부족으로 물리적 시설을 쪼갤 수 없으니 정원만 감축하는 경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시설은 그대로인데 정원만 줄어드니 장애인들만 거처를 잃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수입이 끊기거나 사기를 당해 집 보증금조차 잃어버린 무연고 장애인은 사실상 노숙자 신세가 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집계된 탈시설 장애인뿐 아니라 기존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립해 추적이 되지 않는 무연고 장애인까지 합하면 피해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정원 감축 추세는 탈시설한 무연고 장애인뿐 아니라 갑자기 무연고가 된 장애인에게도 치명적이다. 부모의 사망 등으로 돌봄이 필요한 중증 장애인도 정원이 줄어든 탓에 시설 입소가 막히거나 대기자가 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장애인권익옹호기관 박용민 관장은 “부모가 없어 삼촌에게 학대를 당한 한 장애인은 갈 곳이 없어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면서 “지적장애 엄마가 지적장애 자녀를 방임하는 학대 상황에도 들어갈 시설이 없어 해결되지 않는 사안들도 있다”고 말했다.

‘탈시설 실패’에 대한 마땅한 대비책도 없다. 정해진 법적 매뉴얼이 없다 보니, 탈시설 이후 전화만 몇 통 한다거나 활동지원사에게 사후 관리를 맡기는 등 센터에 따라 제각각이다.

사회복지연대 김경일 팀장은 “장애인 인권 향상 등에 기여하는 탈시설 정책 방향에 대해선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지역 내 시설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산 단기시설 전국 ‘최하위’

갑작스러운 보호자 부재로 갈 곳이 없어진 장애인이 다음 거처를 정할 때까지 쓸 ‘임시 거주시설’(단기거주시설)도 현저히 부족하다.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1000여 명이 이 같은 단기거주시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재 단기거주시설은 147곳(생활 인원 1699명)에 불과해 최소 10배 이상 시설 확충이 이뤄져야 하는 상태다. 지금 당장 돌봄이 필요하지만, 입소를 위해선 많게는 수십 명의 대기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나마 있는 단기거주시설도 사실상 장기거주시설과 다를 바 없이 사용되고 있다. 단기 거주 기간이 끝난 장애인들이 장기 시설의 정원 감축 여파로 갈 곳이 없어져 계속 거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산의 경우 2018년 말 기준으로 단기거주시설이 2곳으로 전국 꼴찌 수준이다. 서울(39곳), 경기(25곳), 대전(18곳), 경남(12곳) 등 타 시·도와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밖에 부산은 지역사회에서 극심한 인권 유린 피해를 입은 무연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전무한 상태다. 격리나 치유 없이 또다시 대규모 장애인 거주시설로 가거나 지역사회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장애인복지시설협회 한우섭 회장은 “거주시설을 필요로 하는 총 장애인 수는 전국적으로 4만 9000여 명에 달한다”면서 “단기시설뿐 아니라 탈시설에 대비한 그룹홈, 지원홈 등 거주홈도 5배 이상 확충돼야 하고, 대규모 시설의 올바른 형태의 소규모화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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