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미리미동국…자취하던 그 집 그 골목, 이렇게 변했네요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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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 담벼락에 현지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익살스러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밀양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 담벼락에 현지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익살스러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밀양 아리랑’이라는 민요가 있다. ‘날 좀 보소’를 간절하게 외치는가 하면 ‘동지섣달 꽃 본 듯이’처럼 서정적인 가사를 읊기도 하는 노래다. 빠르게 부르면 아주 신나는 민요이지만, 속도를 늦추면 눈물이 나는 구슬픈 곡이다.

‘밀양 아리랑’이 신나게 들려오는 재미있는 장소가 지난해 연말 밀양에 만들어졌다. 느릿하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밀양강 둑 너머 나지막한 마을에 조성된 곳이다. ‘진장문화예술 플랫폼 미리미동국’과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다.


1970~90년대 학생들 몰려 살던

밀양강변 낡고 오래된 진장 마을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재탄생

낡은 집 옥상엔 고철로 만든 피아노

허물어진 기와집엔 장난감 블록 벽

빈집은 예술인들의 각종 공방 변신


미리미동국 지붕에 달린 누에 작품. 미리미동국 지붕에 달린 누에 작품.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밀양강 둑 벽에 붙은 플라스틱 상자 모양 작품. 밀양강 둑 벽에 붙은 플라스틱 상자 모양 작품.

■미리미동국

자동차를 밀양강 주차장에 세워두고 둑을 넘어간다. 참고로 밀양 사람들은 밀양강을 남천강이라고 부른다. 밀양강 주변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둑 너머에 ‘382’라는 카페가 보이고, 그 옆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조그마한 난간이 있다. 난간을 건너면 낡은 집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옥상에는 망루가 하나 세워져 있고, 야간 조명 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넓은 안마당이 보이고, 주변을 낡은 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미리미동국은 밀양시가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실시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지난해 조성한 시설이다. 밀양시는 인구 감소, 아파트 증가 등으로 늘어난 진장의 빈집을 재활용하기 위해 사업을 고안했다. 빈집 6채를 5년간 무상 임대해 지역 예술인들이 레지던시 공간으로 활용했다. 미리미동국은 3세기 무렵 밀양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이다. 미리는 우리말 ‘미리’ ‘밀’의 한자 표기이며, 미동은 ‘물둑’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밀양을 ‘미리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장은 1970~9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올라온 밀양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취, 하숙을 많이 하던 곳이다. 가난했던 자취생들은 어머니가 밥을 해 먹으라고 챙겨준 쌀을 쌀가게에 팔아 구한 돈으로 술이나 고기를 사서 친구들끼리 나눠 마시거나 먹으며 청춘을 즐기기도 했다.

미리미동국은 이런 자취방으로 이뤄진 집들을 방 12개의 예술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생활공예, 목공예, 그림, 원예 등의 예술 활동을 펼치는 단체, 개인 작가들이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관람객에게 팔거나 체험 활동, 강의를 진행한다. 이곳은 밀주관, 밀성관, 추화관, 미리벌관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추화관으로 들어간다. 건물 사이 좁은 통로, 그리고 낡은 유리창 틀은 30년 전 고교생들이 자취하던 방 모습 그대로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담장에는 세월의 때가 그대로 남아 있다. 추화관에는 염색 공방 등이 입주했다. 이곳에 빨랫줄을 걸고 염색한 천을 걸어놓으면 밝은 햇살과 어우러져 재미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추화관을 지나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토우공방이 있는 밀성관으로 가는 길이다. 골목길 벽에 액자 같은 틀이 여러 개 달려 있다. 액자 안에는 풀과 잡목이 자라고 있다. 바람에 날려 온 씨앗이 벽의 빈틈에 고인 흙에 안착해 뿌리를 내렸다. 마치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린 독특한 미술 작품처럼 보인다. 토우공방 안쪽 벽에는 장미 화분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과거 이곳에 살던 집주인이 심심하게 보이는 벽을 장식하기 위해 새긴 그림이다.

밀주관에 있는 화원 ‘뜰안 애’로 들어간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 풍란 이끼 볼 만들기 체험을 한다. 풍란에 여러 가지 소품을 붙여 예쁜 화분을 만드는 체험이다. 화원 옆에는 ‘고재, 꽃 피우다’라는 목공예 방이 있다. 다양한 원목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에 마음이 상큼해진다. 일상생활용품에 그림을 그리거나 광목천에 아크릴화를 그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맨 안쪽에 있는 ‘뿔딱 은공예’에서는 깡통 공예품, 은공예품 등을 살 수 있다. 꽃잎 만들기 등 무료 체험도 매주 실시한다.

미리벌관은 본관인 셈이다. 외관을 가장 많이 손 본 곳이다. ‘두루거리 공방’에 가니 천장이 뚫려 있다. 그 사이로 여전히 남아 있는 옛집의 천장이 보인다. 한자로 ‘경인 10월초 10일’이라고 적혀 있다. 서까래를 올려 지붕을 완성한 날이다.

미리미동국 공방에서 만든 여러 공예품. 미리미동국 공방에서 만든 여러 공예품.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는 미리미동국을 둘러싼 골목길이다. 골목길 입구 둑 벽에 투명 플라스틱 상자가 붙어 있다.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담겨 있다. 솔방울, 빈 물병, 때 묻은 분홍색 모자, 어린이용 돋보기와 인형, 볼펜과 공책, 전화기 등 다양하다. 장병수 미리미동국 센터장은 “빈집에 버려져 있던 물건들이다. 도시재생이라는 취지에 맞게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다. 언젠가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몰릴 것을 기대하는 뜻도 담았다”고 말했다.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 벽화들은 다른 벽화마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그림들이다. 밀양과 진장의 역사적 사실을 담은 벽화가 있는가 하면, 각 집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그린 그림도 있다.

한 벽에는 일제강점기로 보이는 시기의 풍경이 담겨 있다. 남정네들은 쪼그리고 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아낙네는 머리에 짐을 이고 그들 곁을 지나간다. 옆에는 ‘밀양읍성 남문’이라는 글이 쓰인 벽화가 있다. 1920년대에 발행된 우표에 담긴 그림을 재현했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벽이 노랗게 칠해져 있고, 다섯 가지 색깔의 의자가 달려 있다. 집 지붕에는 담쟁이넝쿨이 우거졌다.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하게 자라 벽과 싱싱한 조화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회색 담장 벽에 공부하는 학생 그림과 함께 이런 글이 붙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자취생, 하숙생이 많았다.’

활을 당기거나 조총을 겨누는 조선시대 병사들 그림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진장은 포, 조총부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군사들이 진을 치던 장소였다는 데에서 진장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장난감 블록이 붙은 벽도 보인다. 밀양의 어린이들이 사용하지 않고 집 한쪽에 처박아둔 블록을 들고나와 직접 만든 벽이다. ‘공사’를 하던 날 어머니, 할머니까지 몰려나와 예술 작업에 여념이 없는 아들, 손주를 응원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장난감 블록 옆은 다 허물어진 기와집이다. 물론 사람은 살지 않는다. 벽에는 개구리가 그려져 있다. 1970~80년대에는 비가 많이 오면 밀양강이 범람해 진장에는 홍수가 나기 일쑤였다. 여름에는 개구리가 많아 하루 종일 개구리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기와집 반대쪽 벽에는 빨간 장미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위에는 장미 넝쿨이 있다. 봄이 되면 밀양에서 가장 예쁘게 피는 장미로 소문이 나 장미 그림을 만들었다.

진장 문화예술의 거리 마지막 작품은 지금도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담고 있다. 할머니 세 명과 어린이가 재미있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매일 이 거리를 지나면서 벽화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미리미동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밀양강 둑에 올라간다. 지붕에 고철로 만든 피아노가 놓여 있고, 진장이라는 이름을 상징하듯 화살 여러 개가 꽂혀 있다. 그런데 옆에는 누에 한 마리가 기어간다. 왜 누에를 지붕에 얹어 놓았을까. 밀양은 오랜 옛날부터 누에고치로 유명했다. 지금은 부산대 농대에 병합됐지만 과거에는 밀양잠업전문대학이 있었다. 누에에서 나오는 새 실처럼 진장의 미리미동국에서 재생과 부활의 실이 술술 풀려 아름답고 풍요로운 문화예술의 근거지가 되기를 빌어본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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