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사고 나면 광범위 초토화… 공론화는 달랑 인근 주민만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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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경, 영구 핵폐기장 되나] 3. 미완의 공론조사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법’ 근거
반경 5km 내 주민 대표로 참여
사용후핵원료, 핵연료물질 간주
건식 저장 가능하나 활용 미지수

2020년 6월 1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월성 원전 맥스터(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건설 반대 및 주민투표 결과 수용 촉구 기자회견에서 울산 북구 주민들과 환경 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부산일보DB 2020년 6월 1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월성 원전 맥스터(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건설 반대 및 주민투표 결과 수용 촉구 기자회견에서 울산 북구 주민들과 환경 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부산일보DB

“사용후핵연료저장조가 파괴돼 화재가 발생하면 최대 76만 4000명까지 조기사망하는 큰 피해가 날 수 있다.”

원자력안전연구소 한병섭 소장이 올해 7월 18일 부산시의회에서 열린 ‘고리 2호기 수명연장·사용후핵연료 대응’ 행사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원자로에서 막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가까이서 피폭되면 바로 목숨을 잃을 만큼 강렬한 방사선을 배출한다. 관련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최악의 경우 광범위한 지역까지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에 쌓기 위해 2027년께 시설 착공을 계획(부산일보 10월 10일 자 3면 보도) 중이지만, 지역주민의 폭넓은 여론 수렴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형식적인 공론화로 갈등 증폭

한수원은 월성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가 포화로 치닫자 2016년 4월에 지상에 건식저장시설인 ‘맥스터’ 추가 건설을 위한 월성 1~4호기 운영변경허가를 신청한다. 월성 1~4호기는 국내 유일한 중수로 원전으로 12~18개월마다 전체 핵연료의 3분의 1을 교체하는 경수로와는 달리 매일 16다발씩 교체해야 한다. 당시 한수원은 2022년 3월께 월성원전 저장수조가 완전 포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2017년 문제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가 추진되면서 맥스터 증설 사업이 중단됐다.

이후 맥스터 증설 논의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2019년 지역 공론화 작업에 부치기로 하면서 재점화됐다. 이어 2019년 11월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월성원전 지역실행기구’가 출범하고, 이듬해 6월에는 맥스터 증설 공론화를 위한 시민참여단 165명이 선정됐다. 최종적으로 남은 시민참여단 145명은 3주간 숙의학습을 거쳐 3차례의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결국 2020년 7월 24일 시민참여단 3차 설문조사에서 81.4%가 증설 찬성 표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의견수렴 설문 변경 의혹과 주민 간 갈등, 주민설명회 무산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재검토위원회 정정화 위원장이 전격 사퇴하는 난맥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월성원전 맥스터 추가 건설을 위한 의견수렴 주민 대상이 발전소 소재 지자체로만 제한됐다는 점이다. 월성원전 지역실행기구에 참여한 주민 대표는 반경 5km 이내의 경주시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 출신이다. 시민참여단도 경주시민만으로 한정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맥스터 증설 논의에서 소외된 월성원전 지척의 울산에서 극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특히 울산 북구는 월성원전에서 겨우 7~8km 거리 이내에 있어 맥스터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울산 북구민들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지만, 공론화 과정에 참여할 길이 없었다.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은 “실행기구가 경주지역 인사들로만 구성됐기 때문에 울산 시민들은 시민참여단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면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실행기구에 울산 시민도 참여시켰으면 해결될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당시 공론화 과정에서 지역실행기구 주민 대표를 발전소 주변 5km 주민으로만 적용한 이유는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일이 고리원전에도 그대로 일어난다면, 고리원전 반경 5km 이내의 부산 기장군 장안읍과 일광읍, 울산 울주군 서생면 주민 정도만 실행기구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시민참여단에도 기장군과 울주군 주민만 참여가 허용될 게 불 보듯 뻔하다. 이 때문에 건식저장시설 건설 공론화 참여 주민 대상을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범위 내인 30km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 고리 2호기 계속운전을 위한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주민 공람의 경우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 포함된 부산의 10개 구·군과 울산의 5개 구·군, 경남 양산시의 주민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방사성폐기물? 핵연료물질? 자원?

현재 국회에는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 건식으로 저장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주는 여야의 특별법안 3건이 계류 중이다. 한수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해당 법안들이 없어도 현행 원자력안전법으로 고리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을 지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원자력안전법 제20조 제10호와 동법 시행령 제9조 제3호에 따르면 사용후핵연료 시설을 ‘관계시설’로 간주하기 때문에 운영변경허가만으로 건식저장시설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법 체계에서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놀랍게도 사용후핵연료의 법적 지위가 방사성폐기물이 아닌 ‘핵연료물질’로 규정된 탓이다.

사용후핵연료가 방사성폐기물이 되려면 처리나 처분을 위해 원자력진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야 한다. 현재까지 방사성폐기물로 인정된 사용후핵연료는 몇 다발일까. 산업통상자원부 박태현 원전환경과장은 “원자력진흥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방사성폐기물이 된 사용후핵연료는 당연히 단 한 다발도 없다”면서 “국내에서는 아직도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부지조차 선정하지 못한 게 그 이유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정부 계획대로 2060년 영구처분시설이 운영되기 전까지는 원전 부지 내 폐연료봉을 계속 쌓아놔도 문제될 게 없는 셈이다.

심지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기술, 이른바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해 다시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폐연료봉을 폐기물이 아닌 잠재적 자원으로 취급하는 인식도 깔려 있다. 안타깝게도 파이로프로세싱을 상용화한 국가는 현재까지 없다.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우리나라와 미국이 공동으로 진행한 ‘한미 핵연료주기공동연구(JFCS)’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승인했지만, 그 결과를 비공개에 부쳤다. JFCS는 한미 양국이 1997년부터 진행한 파이로프로세싱과 ‘소듐냉각고속로(SFR)’에 대한 연구인데, 두 기술에 대한 타당성 결론조차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670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것을 고려한다면 초라한 결과다.

핵공학 전문가인 원자력안전연구소 한병섭 소장은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를 위해선 어마어마한 예산과 시간이 또 다시 투입될 수밖에 없다. 즉 비용 대비 실익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라며 “파이로프로세싱의 기술력과 효용성, 시간적인 측면에서 옳은 방법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한다”고 말했다. -끝-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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