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경·시민 결사항전… 북한의 ‘속전속결 전략’ 좌절시키다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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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 춘천대첩

6월 25~27일 북한군과 방어전
개전 초 국군 재정비 시간 벌어
북한 병력 4배·화력 10배 우세
고립된 경찰 교전 끝 11명 전사
그새 소양강 남쪽 방어선 구축
시민들 포탄 나르며 옥산포 지켜
남침 첫날 소양강 돌파 계획 저지

2000년 6월 26일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중도 뱃터 입구에 4033㎡ 규모로 준공된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6·25 전쟁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춘천대첩에 참전한 국군, 학도병, 시민의 모습이 조형물로 남겨져 있다. 강원일보=신세희 기자 2000년 6월 26일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중도 뱃터 입구에 4033㎡ 규모로 준공된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6·25 전쟁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춘천대첩에 참전한 국군, 학도병, 시민의 모습이 조형물로 남겨져 있다. 강원일보=신세희 기자

‘치열하게 대전차포를 쏘는 군인들, 그 뒤에서 손으로 포탄을 들어 올리는 학도병, 지게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시민….’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한 조형물의 모습이다.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춘천지구 전투’의 의미를 한눈에 보여 준다.

춘천대첩은 1950년 6월 25~27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 제2사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전이다. 당시 국군뿐만 아니라 경찰, 학생, 제사공장의 여공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북한의 기습 공격을 막는 데 함께 나섰다. 병력 열세를 딛고 ‘24시간 내에 춘천을 점령해 수원 방면으로 기동, 국군을 포위한다’는 북한의 목표를 좌절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전쟁의 징후, 새벽 기습 공격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포병의 공격이 시작됐다. 화천군에서 춘천시에 이르는 관문인 모진교 남쪽에 배치된 국군 9중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전사하며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북한군은 모진교를 점령했다. 당시 북한 전투력은 국군보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면에서 10배 우세했다.

양구군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북산면 내평리도 위기였다. 제7중대가 철수하고 있을 때 춘천경찰서 내평지서는 국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군에 포위됐다.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와 경찰관 12명, 대한청년단원들은 내평지서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1시간 이상 맞섰다. 치열한 교전 끝에 노종해 경위 등 11명이 전사했다. 경찰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국군 제2대대는 소양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경찰청은 내평지서 전투 전사자를 포함해 6·25 전쟁 전사자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경찰충혼탑을 세웠다. 해마다 강원경찰청장은 부임해 오면 가장 먼저 이곳에 들러 참배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춘천대첩 전황도 춘천대첩 전황도

■포탄 나른 시민들…첫날 방어 성공

남침 첫날 소양강을 건너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실패했다. 바로 옥산포 전투가 있었다. 옥산포는 북한강의 작은 포구인데 화천에서 춘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의 요충지다. 국군 제7연대 경계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6연대는 SU-76자주포를 앞세워 내려왔다. 정오에 북한군의 주력이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제7연대 제1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 북한군은 오후 2시께 자주포 10대를 앞세워 다시 옥산포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를 기다리던 제2소대는 57mm 대전차포로 북한의 자주포를 타격했다. 곧바로 특공조가 휘발유 병과 수류탄으로 적 자주포 3대를 파괴했고, 자주포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려던 승무원을 생포했다.

국군이 각종 실탄을 확보하는 데에는 춘천 시민들의 힘이 컸다. 제16포병대대는 소양강 북쪽 대대탄약보급소에 있던 탄약을 소양강 건너편 남쪽으로 옮겨 포탄 5000발 등을 확보했다. 제16포병대장 김성 소령은 “학생, 시민의 도움으로 탄약을 대부분 운반할 수 있어 탄약 부족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춘천대첩 첫날 경찰이 전사했던 북산면 내평지서 모습. 강원일보=신세희 기자 춘천대첩 첫날 경찰이 전사했던 북산면 내평지서 모습. 강원일보=신세희 기자

■작전상 후퇴와 춘천 함락

첫날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제2사단장을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해임된 이청송 후임으로 부임한 북한 제2사단장 최현은 26일 춘천을 점령하려고 했다. 이날 새벽 3시께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오전 10시부터 SU-76 자주포를 소양강 북쪽에 두고 봉의산(강원도청 뒷산) 연대 관측소는 물론이고 소양강 제방 진지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북한의 총공격이 시작되자 대전차포 소대원들은 두려운 마음에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소대장 심일 중위는 진지로 뛰어들어 직접 대전차포 사수가 되어 사격을 개시했다. 대전차포 소대는 북한군의 춘천 시내 진입을 막았다.

북한군은 소양교 돌파에 실패하자 가래묵나루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국군의 포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엄폐물이 없는 강변 모래사장에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맞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제6사단은 이틀에 걸쳐 춘천을 사수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북한군은 27일 새벽 5시부터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 포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의 행정기관, 시민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결심했다.

27일 정오 무렵, 국군 제7연대의 방어도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오후 6시께 춘천의 최종 방어선이 돌파됐고 임부택 중령은 철수를 명령했다. 3일간의 치열한 춘천대첩은 개전 초반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한편 28일부터 북한군 시체를 소양강에서 건져 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꼬박 3일이 걸렸다.

강원일보=신하림 기자 peace@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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