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술혁신 이끈 가야 도래인, 음식 혁명까지 일으켰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규슈국립박물관 ‘가야’ 특별전


오사카부 동부에 가야 도래인이 경영하던 왜 왕권 목장이 있었다. 사진은 특별전에서 말과 소 하니와 8점으로 고대 목장 모습. 오사카부 동부에 가야 도래인이 경영하던 왜 왕권 목장이 있었다. 사진은 특별전에서 말과 소 하니와 8점으로 고대 목장 모습.

가야시대-고분시대 유물로 본

도래인 호족·수장 면모 놀라워


5세기 일본 각지 부뚜막 확산

찜 요리 사용 시루 정착에 기여

도래인 ‘일본 공헌’ 곳곳서 확인


매화가 피어오르는 일본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 그곳 규슈국립박물관에서 1월 24일~3월 19일 개최 중인 <가야(加耶)> 특별전을 행사 주최 측의 하나인 서일본신문사의 지원으로 취재했다.

273점을 ‘가야의 흥망’과 ‘도래인’ 2부로 구성해 선보이는 특별전은 몇 가지 주목할 만했다. 첫째 특별전 이름으로 ‘임나’ ‘가라’가 아니라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加耶’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한일 간 가야사 연구 공감대가 확보돼 온 그간의 과정을 말해준다. 둘째 이번 특별전은 일본에서 30년 만에 열리는 가야 전시다. 애초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가야 본성’(2019)과 연계해 2020년 계획했으나 코로나로 연기되다가 이번에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 이어 규슈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것이다. 제1부 ‘가야의 흥망’ 전시는 160여 점 유물로 가야사의 핵심을 찌르는 것들이다. 양동리·다호리·대성동·도항리·송악동·옥전동·지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표지적인 유물이 전시장에 나와 가야사를 웅변한다.

5세기~6세기 초 ‘가야왕과 국제정세’ 코너에서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 문화재과장이 가야의 다양한 국제적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5세기~6세기 초 ‘가야왕과 국제정세’ 코너에서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 문화재과장이 가야의 다양한 국제적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그러나 이번 전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제2부 ‘도래인’ 전시다.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 문화재과장은 “2부 ‘도래인’ 전시는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우리 박물관에서 처음 선을 보이는 것”이라며 “가야 지역과 가까운 규슈의 역사적 특징을 살려 도래인을 부각했다”고 했다. 규슈국립박물관 전시는 오는 4월 김해국립박물관 전시로 이어진다.

제2부 ‘도래인’ 전시는 전체 273점 중 40%에 해당하는 111점으로 구성돼 있다. 야요이시대 유물 10여 점이 있지만 대부분 가야시대-고분시대 도래인 유물이다. 5세기 기술혁신 시대 유물이 80점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외 20점이 6세기 것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열도로 흘러간 가야 도래인의 실상과 문화는 대단했다. 나라현(니자와센즈카 126호분)에서 발굴된 5세기 후반 ‘바다를 건넌 숙녀’는 ‘금제드리개 달린 귀걸이’를 비롯해 금은 팔찌·반지, 경옥제 옥 등 화려한 유물 11점을 갖추었는데 대가야 도래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오른쪽) 문화재과장이 가야의 철 갑옷을 관람객에게 설명 중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오른쪽) 문화재과장이 가야의 철 갑옷을 관람객에게 설명 중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발굴을 통해 드러난 도래인 호족·수장의 면모는 대단히 놀라웠다.

후쿠오카현(아사쿠라시 쓰쓰미토쇼지고분)에서 발굴된 길이 70m의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도래인과 왜인을 함께 통솔한 가야 제국의 5세기 도래인 호족이었다. 400년 금관가야 타격 이후 일본열도로 넘어간 도래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호족은 토목·토기제작·방적 등의 신기술로 지역개발을 적극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특히 이 도래인은 왜 야마토 왕권을 떠받치던 호족으로 추정됐는데 그의 갑주가 왜 왕권의 중추 공방에서 집약 생산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래인과 왜인을 함께 통솔한 가야 제국의 5세기 도래인 호족 모습. 최학림 선임기자 도래인과 왜인을 함께 통솔한 가야 제국의 5세기 도래인 호족 모습. 최학림 선임기자

도래인 호족의 아들 고분도 있다고 한다. 호족의 고분 근처에 있는, 5세기 왜인 수장의 전방후원분(길이 55m 오타차우스즈카고분)이 그것이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도래인 호족’과 부자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가야에서 건너온 아버지는 도래인과 왜인을 통솔한 호족이었고, 그 아들은 지역을 경영한 왜인 수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들 왜인 수장의 무덤에서는 도래인의 신기술로 만든 높이 1m의 대형 항아리 스에키가 출토됐다.

‘도래인 수장’도 있었다. 인접한 쓰쓰미하스마치 1호분은 크게 파괴돼 유물이 대부분 도굴된 지름 20m 원분(円墳)이다. 이 무덤에서는 한반도 남부 양식의 ‘금제드리개 달린 귀걸이’와 ‘세고리자루 큰칼’(일부)이 확인됐는데 그 피장자는 도래인을 통솔한 수장으로 보인다고 한다.

5세기 도래인 호족의 아들이 왜인 수장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 최학림 선임기자 5세기 도래인 호족의 아들이 왜인 수장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 최학림 선임기자

5세기 ‘기술혁신’은 복수 분야에서 일어났다. ‘철의 은혜’ ‘요업의 시작’ ‘요리 혁명’으로 세분한 관련 유물 전시가 그것을 보여준다. 특히 5세기 일본열도 야마토 핵심부인 오사카 대왕묘 등에서 ‘가야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철정’이 대량 확인됐다. 이는 도래인의 가야 철 기술이 왜 왕권의 중요 기반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발달한 도질토기가 일본열도에 전해져 스에키가 생산된 것은 도래인이 밀려들던 5세기 초반이었다. 이 시기 금동제품이 증가하고, 최대 규모의 고분이 축조되면서 격렬한 정치적 통합 움직임이 진행됐다고 한다. 도래인이 이주하면서 부뚜막을 사용한 새로운 주거 형태가 처음에는 국제항구에 한정됐으나 5세기를 통해 일본 각지에 부뚜막이 확산한다. 부뚜막과 함께 순식간에 확산해 정착한 것이 찜 요리에 사용된 시루다. 도래인은 음식 혁명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 문화재과장이 대가야의 화려한 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규슈국립박물관 시라이 카츠야 문화재과장이 대가야의 화려한 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일본 이주는 ‘도래인’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이른바 ‘도래 말’과 ‘도래 소’도 있었다. <삼국지> ‘위서’는 ‘일본열도에는 소와 말이 없다(無牛馬)’고 했다. 도래인들은 배에 소와 말을 태워 갔는데 이때 군사력과 직결된 기마문화는 일본 각지의 호족들에게 순식간에 퍼져갔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말과 소 ‘하니와(埴輪)’ 8점(높이 27~108.5㎝)으로 꾸민 목장 모습이 관람객들에게 인기다. 이중 소 모양 하니와는 일본에 있는 총 4점 중 1점이다.

오사카부 동부의 이코마시 산록에 왜 왕권의 말을 사육한 목장이 있었다. 이곳에 주거지 140동 이상의 마을 유적이 발굴됐는데 그 주민은 말과 소를 사육하는 전문 기술로 왜 왕권의 목장을 운영하던 가야 도래인들이었다고 한다. 시마타니 규슈국립박물관장은 “도래인의 공헌 없이는 오늘날 일본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며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우정이 더욱더 돈독해지길 기원한다”고 했다.

다자이후(일본)=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