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낙동강 방어선 지켰다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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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마산방어전투

45일 간 5000여 명 전사 참혹
서북산 고지 19번 주인 바뀌어
패배했다면 전쟁 양상 달랐을 것
한·미 동맹 상징 기념관도 없어

1950년 8월 1일 경남 하동과 함양,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방호산 6사단장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은 시간 문제다”라며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군 25보병사단이 8월 3일 마산으로 급파되면서 전투 양상이 달라졌다. 마산을 지키고 뺏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국군과 미군 1000여 명, 북한군 4000여 명 등 무려 5000여 명이 전사한 참혹한 ‘마산방어전투’. 북한군에 대부분 국토를 빼앗기고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다. 만약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요했지만, 기념관 하나 없이 잊히고 있다.


■죽음으로 지켜라

1950년 8월 1일 북한군 6사단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방호산은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하고 소련 유학까지 다녀온 뛰어난 전술가였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6사단 7000여 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먼저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렸다. 당시 이 일대에 주둔한 국군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상주에 주둔한 미군 25보병사단을 250km가 넘는 거리인 마산으로 단 이틀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군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워커 중장은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더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면서 결의를 다졌다. 이로써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요충지였던 해발 739m의 서북산 고지의 주인은 19번이나 바뀌었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인근 함안과 마산 일대, 진주가 다 보여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서북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1000여 명의 아군이 전사했을 정도로 피해는 참혹했다. 산 정상은 수없는 미군 함포 사격과 공군기의 네이팜탄으로 인해 나무가 사라지고 정상 높이가 낮아졌다.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 ‘네이팜’이라고 불렀다.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절박한 위기였다. 마산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까지는 직선 거리로 40~50km에 불과했다. 방어전투에서 패했다면 부산이 위험했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힘들어졌을 것이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한·미동맹군이 승리해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유엔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방어전투 승리에 이어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

■한·미동맹의 상징

마산합포구 진북면 옥녀봉 정상.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당시 참혹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옥녀봉은 물자 수송이 용이한 도로가 인접한 요충지여서 미군과 북한군의 탈환전이 이뤄졌던 곳이다. 정상에는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와 참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현장에 동행한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금속탐지기로 발굴 작업을 하자 탄피, 벨트 버클 등이 발견됐다. 배 회장은 “이 일대에 수십 차례 발굴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전투에 쓰인 총알 탄피, 파편, 버클 등이 나온다. 이만큼 방어전투가 치열했다는 것을 뜻한다”며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군인들이 잊힌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한·미동맹의 상징이기도 한 이 전투가 정전 70주년에 맞춰 적극 재조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 전투 당시 미군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중대장으로서 중대원 100여 명과 함께 고지를 지키던 중 북한군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다 북한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전사 당시 티몬스 대위에게는 7세 아들이 있었다. 아들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이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티몬스 대위의 손자도 미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97년 판문점 인근 미군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3대에 걸쳐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것이다.

박준혁 경남신문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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