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1부-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 10. 법기리 요지와 부산왜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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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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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금의 다완’ 쓰시마이도다완의 비밀 제작 장소”

대이도다완(大井戶茶碗). 명(銘) 쓰시마(對馬). 높이 8.6㎝, 둘레 14.3㎝. 일본 오사카 유키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대이도다완(大井戶茶碗). 명(銘) 쓰시마(對馬). 높이 8.6㎝, 둘레 14.3㎝. 일본 오사카 유키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1609년 일본의 요청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우리나라 기록이 있다. 그 기록 속 도자기를 제작한 곳이 바로 사적 제100호인 양산 법기리 요지이다. 일본은 1639년에 법기요가 있는데도 도자기 만드는 요(가마)를 두모포왜관(부산 동구 수정동 부근) 안에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이유는 당시 국법에 따라 왜인은 왜관 밖을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주문할 때는 도자기가 그려진 서계를 조선 역관(통역)이 일본인 대신 법기리요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 의중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1644년 왜관 안에 도자기 만드는 가마(요)가 들어섰다. 그리고 1678년 두모포왜관은 용두산 근처의 초량왜관으로 이전했다.

왜인들, 왜관 밖 출입이 금지

법기리요엔 역관 통해 주문 불편

초량·두모포 왜관 내에 가마 설치

‘부산왜관요’ 관장은 쓰시마서 전담

가치 하락 우려한 영주들 자극 피하려

‘찻사발의 황제’ 이도다완 은밀히 만들어

대마도 생존 위해 영주에 로비용 선물

쓰시마이도다완 굽과 비슷한 사금파리

양산 법기리 요지서 발견되기도

대다수 일본학자는 두모포왜관에 있던 가마를 두모포왜관요라 하고, 초량왜관에 있던 가마를 초량왜관요로 구분한다. 또 두 곳을 통칭해 ‘부산왜관요’라 한다. 하지만 일본 주문 도자기를 논할 때 부산왜관요를 ‘부산요’라 부르는 한국 사람들과 소수의 일본인이 있다. 그것은 일본 주문 도자기를 처음 논한 책, 아사가와 노리타카(淺川伯敎)의 <부산요와 대마요>와 두 번째로 주문 도자기에 관련된 대마도 문서를 해석한 책, 이즈미 도이치(泉澄一)의 <부산요의 사적연구> 영향이라 사료된다. 하지만 일본학자의 말을 무조건 따라 해선 안 된다. 일본학자들은 일본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산은 옛 가마(요)터가 많이 있다. 이 옛 가마들은 일본주문품을 만드는 부산왜관요 빼고는 전부 부산사람을 위한 그릇을 만들었던 곳이다. 필자는 부산왜관요를 ‘부산요’란 명칭으로 논하는 그 자체가 부산을 무시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부산왜관요가 설립되고 나서 양산법기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에도 계속 비공식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초량왜관요에서 만들었던 도자기와 똑같은 종류의 사금파리가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한스다완(半使茶碗)도 증거가 된다. 한스다완은 조선 통역관이 가져가 대마도에 판 다완인데, 대마도 기록에 의하면 부산왜관요를 운영할 당시 조선통역관들이 가지고 온 다완을 사느라 예산이 많이 들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부산왜관요 외에 일본 취향의 다완을 만드는 곳은 양산법기요가 유일했다. 또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한스다완의 사금파리도 출토되었다.

고혼다완(御本茶碗)이란 일본이 그림을 그려 부산왜관요에 주문한 다완이라는 뜻이다. 고혼다완의 원형 중 일부는 임진왜란 전에 부산포왜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조선사발 중 일본인이 찻사발로 전용한 다완들이다. 예를 들어 덤벙분청의 일본말은 고비끼(粉引)이다. 고혼고비끼는 덤벙분청사발을 모델로 삼아 주문한 다완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혼미씨마, 고혼하케메 또한 임진왜란 전에 건너간 조선 분청사발과 분청귀얄사발을 모델로 부산왜관요에 주문한 다완을 뜻한다. 그리고 조선의 지방 백자나 청자를 모델로 한 고혼다완도 있다.

대이도다완(大井戶茶碗) 뒷면. 대이도다완(大井戶茶碗) 뒷면.

고혼고쇼마루(御本御所丸)다완은 17세기 초반에 양산 법기요에서 일본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을 모델로 해서 부산왜관요에 주문해 만들었던 다완을 말한다. 고혼긴까이(金海)다완, 고혼고끼(吳器)다완도 고혼고쇼마루다완과 같은 경우다. 그리고 부산왜관요의 다완 분류명에는 부산왜관에서 일하던 일본인 도공두 이름을 분류명으로 삼은 다완도 여럿 있다. 예를 들면 모산(茂山)다완, 겐에쯔(玄悅)다완 등이 있다. 양산법기요와 부산왜관요에서는 정말 여러 종류의 다완을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은 쓰시마(對馬島), 즉 대마도가 전담했다. 그런데 대마도의 기록에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도다완은 일본에서 찻사발의 황제로 추앙되는 다완인데 왜 이도다완을 모델로 삼아 양산법기요와 부산왜관요에 주문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이지만 당시 이도다완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큰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들이었는데, 이도다완의 수가 많아지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하여 대마도에서는 힘센 다이묘들을 자극하기 싫었을 거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도다완을 정말 흉내내지 않았을까?

대이도(大井戶)에 속하는 쓰시마이도다완(對馬井戶茶碗)이 있다. 이 다완은 일본 에도시대 중기에 갑자기 등장해 당시 차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자태가 당당하여 ‘천금의 다완’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명(銘)이 쓰시마(對馬)인 이유는 대마도의 영주인 다이묘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대부분의 이도다완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사발이다. 그리고 대이도다완의 대부분은 조선 초기 진주부 지방의 민가의 제기‘제사상에 메(밥)올리는 사발’로 제작됐다. 그래서인지 말차를 마실 때 조금은 불편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원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유키(湯木)미술관에서 쓰시마이도다완으로 말차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그 다완은 제기가 아니라 말차 사발로 쓰기 위해 만든 것임을 직감했다. 필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의 이도다완들을 거의 다 손으로 직접 만져 본 다음 일본에서 <이도다완의 수수께끼(井戶茶碗の謎)>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그 날 만져 본 그 다완의 굽은 조선 본래의 이도다완의 굽하고는 조금 달랐다. 나는 쓰시마이도다완과 비슷하게 굽을 깍은 사발의 사금파리를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본 적이 있다. 추측이지만 대마도는 겉으로는 힘센 다이묘를 의식해서 이도다완을 만들지 않는 척했을 뿐 실제로는 비밀리에 제작했을 개연성이 크다.

대마도는 양산법기요와 부산왜관요가 1717년에 일시정지되었다가 1739년에 폐쇄되기 전까지 1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도자기를 만들어 가져갔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그 많은 도자기를 어떻게 처분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 점도 팔지 않았다. 대마도 생존을 위해 일부는 쇼군(일본 최고권력자)에게 상납하고 일부는 본토 고위층과 힘센 다이묘들에게 로비용 선물로 사용했다. 대마도가 자기들 이익을 위해 조선 조정의 국서와 일본 쇼군의 국서를 위조한 사건이 들통 나 위태로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 고려 황다완을 가지고 로비했다는 내용이 대마도의 기록인 <매일기(每日記)>에 기재되어 있다. 고려 황다완은 기이라보다완(黃伊羅保茶碗)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번(藩)이 기본 행정단위 중 하나인데 그 지위를 쌀 생산량으로 구분해 왔다. 이른바 쌀 생산량이 클수록 크고 중요한 번으로 취급받았다. 대마도는 쌀 2만 석의 작은 번(藩)이었다. 그러나 양산법기요와 부산왜관요 덕분에 무려 20만 석 수준의 번으로 대접받았다.

지난 4월 27일, 사적 제100호 양산 법기리 요지 사기장 추모 헌다제를 처음으로 지냈다. 그때 필자가 읽은 추모 헌다문이 다음과 같다.

‘오늘 기해년 사월 스무이레, 새봄을 맞이하여 양산시민과 법기리 주민은 그 옛날 일본 차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위대한 예술품을 만드셨던 사기장님들에게 깊이 고개 숙이고자 합니다. 당신들의 탁월했던 기재는 일본을 흔들어 놓았고, 그날의 작품들은 일본인의 보물이 되어 그들의 수장고에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땀방울과 열정은 이곳 양산 법기리에서는 사금파리가 되어 잡초와 흙더미 속에 그저 파묻혀 있습니다. 그 위로 비바람만이 휑하니 지나갈 뿐입니다. 하여 오늘 당신들에게 죄와 안타까움을 고백합니다. 비록 1963년 국가사적 100호로 지정하긴 했지만, 그동안 내내 방치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도자기는 모두 바다 건너에 있고, 우린 당신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무심함과 방관을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오늘 저희들은 당신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차를 올립니다. 만시지감에 가슴 한 쪽을 도려내듯 아프지만 이제부터라도 당신들의 발자국과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 여겨 주시고 부디 흠향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 필자가 조선다완의 분류명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은 아직 한국식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1부 끝-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 사기장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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