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2부-부산다움의 근원 부산요 4. 주문다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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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홍 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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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절영도 왜관의 개시 이후 법기리 요지서 생산”

다찌쯔루다완(立鶴茶碗) 높이 9.8㎝, 지름11㎝. 신한균 제공 다찌쯔루다완(立鶴茶碗) 높이 9.8㎝, 지름11㎝. 신한균 제공

일본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다완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임진왜란 전에 다도용으로 가져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란(壬亂) 혹은 그 이후에 주문 방식으로 수입한 것이다. 일본의 주문 다완은 어떤 종류가 있을까? 필자가 30년 동안 일본에 소장된 우리 사발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귀한 것(값이 비싼 것)부터 풀어 본다.

임진왜란 전후 일본 최고의 차 선생

후루타 오리베와 고보리 엔슈 활동 시기

양산 법기요서만 일본 주문품 만들어

부산왜관요와 달리 일본인 간섭 없어

조선 사기장의 개성과 특성 많이 내포

향교 제기 디자인 한 고쇼마루다완

법기리서 만들어진 이라보다완

부산왜관요서 만든 어본데다완 등

대표적인 주문다완으로 손꼽혀

일본 주문 다완의 첫 기록은 1611년의 일본 무역 담당인 동래부의 기록인 〈변례집요(邊例集要)〉에 나온다. 하지만 주문 다완의 시작에 대한 기록은 한국, 일본 어디에도 없다. 본격적인 주문 다완의 기록은 쓰시마 번(대마도)의 번정 일기인 〈매일기〉가 시작되고 나서이다. 필자의 추정이다. 1598년 임란이 끝나고 1601년 절영도(현 영도)왜관이 시작된다. 1603년부터 동래부의 승인으로 절영도 왜관에서 개시(開市, 조선과 일본 상인 사이의 무역)가 시작된다. 필자는 이때부터 법기요지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이유는 절영도 왜관은 동래부 소속이었고 정황상 양산 법기리 요지는 동래부의 가마였고 당시 일본인이 가장 원했던 무역품이 주문 다완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문 다완은 누가 디자인 했을까? 임란 전에 일본 다도를 완성한 센노 리큐(千利休)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을 반대한 센노 리큐는 히데요시에게 할복을 명령 받고 임란 직전에 숨진다. 이로 인해 임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센노 리큐의 제자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가 일본 최고의 ‘차(茶) 선생’이 된다. 오리베는 일본 오리베 도자기를 디자인 해 오리베 야끼를 탄생시킨 사람이다. 그는 임란 중과 전쟁이 끝나 조선과 일본 수교 협상 동안에도 자신이 디자인한 다완을 조선에 주문했다고 한다. 후루타 오리베는 1615년에 할복했다.

오리베를 뒤이어 일본 최고의 차 선생이 된 것은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615년은 양산 법기요만 일본 주문품을 생산하는 시기이다. 법기요에서 만든 오리베 디자인은 법기요의 초기에 해당 된다. 그리고 1615년부터는 고보리 엔슈가 디자인한 다완을 만들기 법기요에서 만들기 시작했으리라고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오리베 디자인 다완이 고보리 엔슈 디자인보다 훨신 비싸다. 그리고 법기요지에서 만든 다완 생산품은 대체적으로 조선적 특성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왜관에 있는 일본인은 한발짝도 왜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여 역관(통역)이 일본에서 온 서계를 참조하여법기리에 주문했기에 왜관 안에서 일본인 도공두의 직접 지시하에 만들어진 부산왜관요 다완들 보다 일본인 간섭이 없이 만들어진 법기리 요지의 다완들은 조선 사기장의 개성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양산 법기리의 초기 생산품으로 여겨지는 고쇼마루다완(임란 중 일 가능성도 있음), 가키노헤타다완, 호리미씨마다완, 이라보다완은 1615년에 죽은 후루타 오리베가 디자인 한 것으로 추정한다. 즉, 앞서 언급한 다완들은 양산 법기요의 초기 생산품이라는 애기다. 일본에서도 이들 다완을 오리베 취향이라 한다.

다음은 주문 다완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고쇼마루다완은 후루타 오리베가 김해의 향교(鄕校)에서 제기로 쓰던 그릇을 보고 디자인 한 것이라 설명했다. 일본에 10점 정도만 있는 아주 귀한 것이다.

두 번째, 감꼭지 형태를 가진 다완이다. 일본말로 가키노헤타다완이라 불린다. 이것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기록한 〈변례집요〉에 기록된 ‘와기(瓦器)’라 추정되는 옹기 사발이다. 도자기가 아니라 옹장(옹기 장인)의 물레 솜씨로 만들어진 다완으로 추정된다. 옹기 물레는 도자기 물레와 반대 방향이다. 현재 일본에는 혼테가키노헤타다완은 8점 밖에 없다. 혼테는 진짜라는 뜻이다. 필자는 양산 법기요에서 옹기 기법으로 만들어진 사금파리를 보았다.

세 번째, 호리미씨마다완이다. 이것은 분청사기 사발이다. 〈변례집요〉에 ‘도기(陶器)’로 기록된 사발로 여겨진다. 현재 일본에 30점정도 있다.

네 번째, 이라보다완이다. 녹청자 계열인 이라보다완은 종류도 많고 일본에 존재하는 개수도 많다. 개수가 많은 데도 가격은 비싸다. 그 이유를 일본 차인에게 물어보니 일본 말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다완이라고 한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양산 법기요지는 많은 종류의 다완을 만들었으나 일본 차인에게는 이라보다완을 만든 가마로 알려져 있다.

다섯 번째, 주문한 도토야다완의 특징은 굽과 굽 위의 부분에 흙 주름처럼 보이게끔 흙이 짝짝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특징이다. 필자는 흙 주름이 있는 것은 일본인이 주문한 법기리 생산품이라 추정한다.

여섯 번째, 긴까이(金海)다완이 있는데, 이 다완은 사실 한 종류로 보기에는 형태, 흙질감 등의 공통성이 없다.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상자에 긴까이다완이라는 기록 때문에 긴까이다완이라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해는 임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군대의 본진이 주둔한 곳이다. 하여 당시 일본 장수들은 김해의 사기장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장수들은 대부분 차인이었으며, 일본 차인들은 사기장을 불려 자기가 디자인 한 차사발을 직접 사기장에게 시켜 한 두 점 만들어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일본에 있는 긴까이다완 중 ‘김해(金海)’라는 한문이 각인된 것과 특별한 형태를 가진 다완의 일부는 임란 중 일본 장수가 김해에서 만들어 가지고 갔다고 추정한다. 양산 법기요지에서는 긴까이다완으로 불려지는 다완의 사금파리로 추정되는 것들은 출토되었지만 김해에서는 일본 주문 다완의 사금파리는 출토된 적이 없다.

일곱 번째, 오기다완. 이 다완은 왜란 전에 지방의 제기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홍엽오기다완과 조선 통신사가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에 머무를 때 배에서 쓰던 식기를 선물로 준 것으로 알려진 대덕사 오기다완과 여러 종류의 오기다완들로 나눈다. 주문 오기다완은 대부분 대덕사 오기다완을 모델로 하여 주문 한 것으로 추정되며 양산법기요와 부산왜관요 두 군데서 많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여덟 번째, 한스다완은 동래부의 역관들이 양산 법기요에 주문하여 일본 쓰시마로 가져가 판매한 다완을 뜻한다. 양이 많다.

아홉 번째, 어본데다완은 일본이 부산왜관요에 주문해 일본인 감독 하에 조선 사기장들이 만든 것을 말한다. 이것의 종류는 그림을 그려 서계로 주문한 어본다완과 왜관의 도공두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들(다완 명이 도공두 이름)로 나누어진다. 일본에 많은 양이 있으며 다완의 분위기는 완전히 일본풍이다. 어본다완들은 양산 법기요의 초기 생산품인 가키노헤타다완, 이라보다완, 도토야다완, 호리미씨마다완에 비하면 아주 가격이 싸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국보가 된 조선의 제기였던 기좌에몽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을 일본 국보 26호라고 신문에 나기도 했고 또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이것은 가짜 뉴스다. 일본은 국보에 몇 호라고 표시하는 자체가 없다.

다찌쯔루다완의 뒷부분. 교토 노무라미술관 소장. 다찌쯔루다완의 뒷부분. 교토 노무라미술관 소장.

주문 다완이며 일본에 10점만 존재하는 명품 사발을 소개하겠다. 이 다완의 일본 이름은 다찌쯔루다완(立鶴茶碗)이다.

끝으로 이번 기사에서 설명한 다완의 사진은 ‘법기요, 부산왜관요 궤적을 쫓다’ 중에서 1부. ‘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를 참조하기 바란다.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사기장)


끊어진 조선 도자기의 맥을 되살리고 그 이름을 되찾는 데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박진홍 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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