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오므라이스와 정상회담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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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국제 관계 발전을 위한 가장 오래된 외교 도구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국가 요리사 임명장 수여식’에서 한 말이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표현처럼 음식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음식은 국가 최고 지도자들의 만남에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 메뉴는 정상회담의 연장으로, 미묘한 신경전과 배려, 정서적 소통과 회담 분위기를 전하는 상징이 된다. 영국 BBC 방송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메뉴에 담긴 외교: 음식은 어떻게 정치를 형성할 수 있나’라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16일 일본을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도쿄 긴자의 경양식집 ‘렌가테이(煉瓦亭)’로 자리를 옮겨 일본식 오므라이스를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 갈 계획이라고 한다. 오므라이스는 19세기 말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양음식을 일본인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현지화한 메뉴다.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문화적 가교 역할도 했다. 고슬고슬하게 볶은 밥을 보들보들하게 부쳐 낸 달걀로 덮은 뒤 진한 소스를 끼얹은, 서양식 달걀 요리인 오믈렛과 밥을 합쳐 놓은 형태다. 계란을 익히는 정도에 따라 모양과 맛이 갈려서 요리사의 실력을 판별할 수 있는 메뉴로도 알려져 있다.

묘하게도 원조 경양식집 렌가테이가 긴자 번화가에 문을 연 1895년과 한·일 정상회담을 하는 2023년의 국제 정세가 판박이인 듯하다. 19세기 말이 유럽에서 영국과 독일 두 제국을 중심으로 합종연횡해 세계 질서가 급변하는 때였다면, 현재는 미국과 중국으로 열강만 바뀌어 나머지 국가들이 연합하거나 대립하는 상황이다. 역사는 돌고 돌 듯 미·중 패권 경쟁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심화되면서 동아시아 질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이다.

기시다 총리는 렌가테이 정상 만찬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으면서 달걀에 덮여 있는 볶음밥의 감칠맛과 쓴맛, 짠맛, 단맛 하나하나를 애써 느껴 보기를 당부한다. 혹시나 일본 지도자들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1930년대 제국주의 향수와 맛을 그리워한다면, 한국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지도자 국가로 부상하기 위한 도덕적 기반마저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요리는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을 제각각 살려 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일본에 필요한 것은 향수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려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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