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 코드’ 낭패에도 빈필이 연주한 오페라 관람 ‘감동’ [부산 청년작가, 유럽에 가다]
<1>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관람기
오스트리아 세계문화유산 도시
베르디 오페라 ‘팔스타프’ 공연
신선한 연출과 무대 감동 커져
예술 존중하는 관객도 인상적
“음악이 ‘콘크리트’에서 나올 순 없잖아요!”
오스트리아 빈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현지인 가이드 박승현 씨가 툭 던진 말인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빈은 대도시여서 그렇다 치더라도 잘츠부르크는 겨우 인구 15만 명의 소도시인데도, 인구의 몇백 배나 되는 2930만 명이 한 해 동안 방문할 정도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그 요인이 뭘까 궁금했다.
이달 중순 부산의 청년작가 8명과 함께 떠난 ‘해외 문화 탐방’ 첫 순서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이야기를 다룬다. 프랑스 칸의 국제영화제가 있다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엔 페스트슈필레(페스티벌)가 있다고 할 만큼 명성을 자랑하는 음악 축제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 도시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뒤 그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잘츠부르크는 과거와 현재, 예술, 문화, 자연을 너무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이 인상적인 조합은 1997년 잘츠부르크 역사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릴 수 있도록 했다.
구시가지 도보 투어에 나섰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가 살았던 봉쇄 수도원인 논베르크 수녀원을 지나 과거의 마법이 남아 있는 듯한 구불구불 골목길을 걸었다. 푸니쿨라(케이블카)를 타고 세계문화유산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에 올랐다. 이 성은 중부 유럽 최대의 파괴되지 않은 요새라고 했는데, 전망대에선 잘자흐강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도심 반대편으로는 알프스산맥의 절경이 펼쳐진다. 잘츠부르크 시내를 다니는 버스도 전기차 일색이고, 속칭 ‘배달의민족’도 오토바이는 안 되고 자전거를 이용해야 한다니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꾸기 위한 도시의 노력이 짐작된다.
성을 내려와서는 잘츠부르크 대성당 인근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생가로 향했다. 모차르트 생가가 위치한 구시가지 번화가 ‘게트라이데 가세(거리 혹은 골목)’를 걷는데 가게 표지판이 인상적이다. 또한 아름다운 입구와 달리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창문이 특징인 건물이 즐비했다.
모차르트는 이 거리 9번지의 한 건물 3층에서 1756년 태어나 1773년까지 17년간 살았다고 한다. 건물 입구에 그의 생가임을 알리는 동판과 특별한 초인종(3층까지 연결된 철사 같은 줄 끝에 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어 1층에서 당길 수 있도록 했다)이 보인다. 200여 년 전 모차르트가 실제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너도나도 한 번씩은 당겨 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별것 아닌 듯했지만 줄 하나에도 스토리를 담았다. 건물은 전체가 모차르트 박물관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에 온 만큼 영화의 배경이 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 아름다운 미라벨 정원에도 들렀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주인공 마리아와 폰 트랩 일가 아이들이 ‘도레미 송’을 촬영한 곳이다. 정원은 형형색색의 꽃과 화단, 분수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한낮 기온이 연일 30도를 웃돈 데다 나무 그늘이 많지 않아서 햇살은 따가웠다.
■음악회 드레스 코드 확인은 필수
그런데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우리 일행은 ‘멘붕’에 빠졌다. 안내를 맡은 황성혜 가이드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페라 관람 드레스 코드를 언급하면서부터다. 출국에 앞서 세 차례의 워크숍을 가지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 여행사 관계자를 통해 드레스 코드를 문의한 적은 있지만, 그 대표도 유럽 현지에서 오페라를 관람한 경험이 없어선지 우리에게 충분한 조언을 해 주지 않았다. 우리 대부분이 격식을 갖춘 의상과 구두를 별도로 준비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오페라 관람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날따라 일요일이어서 상가는 전부 문을 닫아서 새로 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 최대한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사전 예매한 오페라가 공연될 페스트슈필레로 향했다. 이날만 해도 해가 길어서 오후 8시 공연이었다. 김푸름 바이올리니스트 표현처럼 “페스티벌 공연장으로 가는 길부터 너무 아름다웠다. 다른 세상으로 나오듯이 터널 길을 지나니 신사와 숙녀들이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서 드레스 코드를 맞춰 온” 게 눈에 들어왔다.
황 가이드의 말이 그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세계에서 이 축제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온다더니 과연 그랬다. 공연이 시작되려면 1시간 이상 남았는데 ‘그로스 페스트슈필하우스(축제대극장)’ 건물과 마주 보는 ‘펠젠라이트슐레’가 있는 사이 공간은 오페라를 보러 온 양복과 롱드레스 차림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음악 축제 명성만큼이나 복장 규정도 까다롭다더니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이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듯 여성용 샌들을 신은 사람은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으려고 더욱 당당하게 걸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안내인을 따라 공연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그림과 붉은 카펫 혹은 대리석이 펼쳐지고, 샴페인과 맥주잔을 기울이는 진풍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정장을 차려 입은 안내인들과 각종 벽 그림과 붉은 양탄자 혹은 대리석, 그리고 샴페인과 맥주잔을 기울이는 풍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1920년 창단된 음악·연극 축제
사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한 편을 본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오페라의 경우 관람료는 최저 30유로(4만 3000원)~최고 465유로(67만 원)에 달할 뿐 아니라 표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다.
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지난달 20일 시작해 이달 31일까지 43일 동안 15개 공연장에서 179회 공연을 선보였다. 축제 하이라이트인 오페라에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베르디의 ‘맥베스’와 ‘팔스타프’가 포함됐다.
이뿐 아니라 1920년 8월 22일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 광장에서 첫선을 보인 연극 ‘예더만(Jedermann)’은 지금도 변신을 거듭하며 100년 넘게 공연 중이다. 이 관행은 이제 전통이 돼 개막작 ‘예더만’은 항상 대성당 광장에서 공연된다고 한다. 야외무대 무료 공연도 꽤 있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별도로 구성됐다.
페스티벌의 큰 축은 연극, 오페라, 콘서트가 차지한다. 페스티벌을 만든 막스 라인하르트 감독은 ‘도시 전체가 무대’라는 모토를 내세워 잘츠부르크의 수많은 좁은 골목길과 넓은 광장에 반영했다. 한동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여름 오페라 축제로서 명성을 드높이기도 했다.
■제3의 인물 등장시킨 ‘팔스타프’ 신선
우리가 사전 예매한 오페라는 베르디의 마지막 희극 작품인 ‘팔스타프’였다. 국내서도 보기 드문 오페라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지난 12일이 초연이었고, 이후 30일 마지막 회차까지 총 6회를 공연했다. 음악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잉고 메츠바허)가 맡았고, 연출은 크리스토프 마르탈러였다.
출국에 앞서 오페라 대본을 찾아서 읽고, 유튜브를 통해 음악도 들어보긴 했지만, 현장에선 본 공연은 완전히 달랐다. 이탈리아어로 노래하고, 영어와 독일어 자막이 나와서 그나마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일정 부분 도움이 됐지만, 작품 배경 자체가 완전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영화감독 오슨 웰스로 짐작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해 팔스타프(베이스바리톤 제롤리 핀리)를 비롯한 작중 인물들과 촬영을 진행하는 듯한 장면이 극 중 극 형식으로 전개됐다. 신선했다. 더욱이 3개의 공간으로 분할된 길쭉한 무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배우들이 움직였다. 극 중 촬영을 위한 분장과 준비 장면도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심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이 있을 텐데, 도무지 어디에 초점을 두고 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이 시작되는 게 아니었다. 마치 여러 개의 스튜디오가 동시에 돌아가는 듯했다.
청년작가들을 인솔한 오보이스트 권성은 부산음악협회 회장은 “세계적인 무대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로 구성된 오페라 연출은 현대적으로 바꾸어 낯설지 않았다. ‘팔스타프’ 희극을 재미있게 표현해 2시간 40분이나 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소리와 성악가·합창단의 우렁찬 소리는 환상이었다”고 감동을 전했다.
■빈 필 연주 감동·관람객 태도 인상적
청년작가들의 관람 호평도 쏟아졌다. 김푸름 바이올리니스트는 “빈 필을 영상 매체가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게 정말 좋았다.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단 한 명도 음정 미스가 없는 것을 보고 ‘아 정말 명불허전 빈 필이구나’를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페라도 옛날 오페라를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식으로 바꿔서 눈과 귀가 즐겁고 호강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춤꾼 이다영은 “유럽인들의 문화 예술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노인들도 구두에 정장과 원피스를 멋지게 입고 오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고 말했다.
김가영 연극인은 “오페라 ‘팔스타프’ 공연은 연출하는 입장에선 굉장히 파격적이었다”며 “200명이 넘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합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했다”는 장학민 시인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껴지는 전율에, 예술이란 이해하는 게 아닌 이해시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하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어딘가 압도되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손유하 작가(한국화)는 “잘츠브루크의 오페라는 깊은 여운을 주었다. 현대식으로 해석한 ‘팔스타프’는 유머와 감동이 공존하는 무대였다. 더욱 깊은 몰입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못할 경험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변선화 건축사는 “오랜 도시와 새로운 오페라의 협연. 희극과 코미디의 묘한 경계. 음악과 미술과 건축이 어우러진 예술”에 감동을 받은 듯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생애 처음으로 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페라였기에 두고두고 기억될 듯싶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이 프로그램은 (사)부산예술후원회가 지원했습니다.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