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가을볕이 너무 좋아/박노해(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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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 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비춰오는 살아온 날들을

-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2022) 중에서


‘말리는 것’은 치유하는 것이다. 햇볕 속엔 나쁜 바이러스를 없애는 백혈구가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내 슬픔’이나 ‘상처난 욕망’ 등을 치유하는 데에 제격이다. 가을 들길을 걸으며 온몸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을 때면, 저절로 몸에 활기가 돌아 ‘나’도 황금 들녘의 곡물처럼 무르익어가는 것 같다. 햇볕이 내 안에 들어와 우울한 감정과 상처들을 태워 버리고 몸을 달구어, 불가마 속의 도자기처럼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때 나는 햇볕의 자식, 햇볕의 영혼!

노동자로 투사의 삶을 살았던 박노해 시인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을 햇볕에 ‘흙마당의 빨간 고추’가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가진 존재로 승화돼 가는 신비를 알아채고 이를 표현하고 있다. 가을볕에 말라가는 ‘흰 빨래’나 ‘고추’처럼 소외된 노동자로서의 고통, 슬픔도 말갛게 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을볕이 너무 좋아’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을볕은 슬픈 존재를 치유하는 신의 눈빛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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