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줄 막힌 부산 중소기업 "정책금융은 그림의 떡"
부산상의, 제조기업 251곳 조사
71.3% '정책자금 이용 경험 없어'
실효성 낮다는 응답 절반 차지
문턱 높아 현실성 떨어진단 지적
가용 자금이 궁했던 부산 중견기업 A 사는 지난해 말 정책금융을 통해 10억 원을 대출받았다. 그러나 A 사는 현재 그 중 절반인 5억 원을 고스란히 비치해 두고 있다. 어렵사리 받은 정책금융 대출이지만 용도 외 목적에는 사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A 사 담당자는 “정책자금과 시중은행 대출 금리 차이가 1% 정도인데, 그 이자 차이라도 아쉬워 빌리긴 했지만 결국 모자라는 5억 원을 다시 은행에서 대출해서 썼다”면서 “사전에 대출받은 용도대로 딱딱 맞춰 자금을 쓸 수 있는 중소기업이 부산에 몇 곳이나 있겠느냐”며 푸념했다.
부산의 제조업체마다 원가 부담과 금융비용 증가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를 해결해 줄 정책금융은 사실상 ‘그림의 떡’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출 심사가 강화되면서 높아진 금융권의 문턱만큼 정책자금도 수혈 요건이 까다로워져서 이용률이 극도로 저조한 것이다.
부산상공회의소는 11일 부산 매출액 상위 600개 제조 기업을 대상으로 자금조달 실태 조사를 벌여 이를 공개했다. 251개 사가 응답한 이번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1.3%가 ‘정부나 부산시의 정책자금을 이용한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부산의 제조업 매출액 상위권 기업 10곳 중 7곳이 정책자금에 대한 기대를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자금난으로 인한 자금 조달처를 묻는 질문에 92.5%가 ‘은행권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답했다. 정책금융이라고 답한 기업은 겨우 6.2%에 불과했다.
부산 제조기업이 정책금융을 꺼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 지원 요건은 까다로운 반면 A 사처럼 대출을 일으켜도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책금융을 이용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기업들은 △실효성이 낮다(48.4%), △지원 요건이 안 된다(18.9%), △이용 절차가 복잡하다(10.7%) 순으로 답했다.
일부 기업은 정부와 부산시가 정책금융 자격 요건으로 내세운 매출액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꼬집었다. 어느 정도 사업장 규모가 커지면 나가는 돈도 더 많아지는데, 정작 자금이 필요한 기업은 매출액이 높다는 이유로 정책금융의 수혜를 입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번 조사 결과 부산의 제조업계를 덮친 자금난은 금리가 역대급으로 치솟았던 지난해에 비해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 기업 68.5%가 ‘지난해와 비교해 자금 사정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오히려 21.9%의 기업은 ‘지난해보다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고 답했다.
자금사정 악화의 가장 큰 원인은 ‘원자재와 인건비 등 원가 상승에 따른 자금수요 증가(40.0%)’를 가장 많이 꼽았다.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목적 자체가 대부분 원·부자재 구매여서 러시아 전쟁 이후 부산 제조업계의 원가 상승 부담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게 부산상의의 설명이다.
부산상공회의소 기업동향분석센터는 “고금리가 장기화될 경우 한계기업은 물론 지역 우량기업마저도 자금난에 직면할 우려가 크다”며 “어려운 시기인 만큼 자금 수혈이 필요한 기업들에게 정책금융이 적기에, 적정 규모로 지원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요식행위를 간소화하고, 산업계 자금수요 모니터링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