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사냥꾼' 행동주의 펀드는 약인가 독인가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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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 하는 주주 / 김규식

특정 기업 주식 매입 후 경영 참견
'협잡꾼' 등 비난의 대상 되기 일쑤
실제론 주주 가치 제고 긍정 효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KT&G 본사. 행동주의 펀드 칼 아이칸은 KT&G에 투자하면서 사내 수많은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고 주주 가치 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 부산일보DB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KT&G 본사. 행동주의 펀드 칼 아이칸은 KT&G에 투자하면서 사내 수많은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고 주주 가치 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 부산일보DB

2003년 3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곧이어 4월에 소버린이라는 미국계 투자펀드가 SK주식회사 지분을 8.64%를 확보했다고 선언한다. 당시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분식회계를 저질러 감옥에 가게 된 사실도 세간에 큰 충격이었지만, 오너의 부재를 틈타 외국계 펀드가 지분을 늘렸다는 소식 역시 앞선 것 못지 않은 충격을 건넸다.

물론 당시 국민 감정은 결코 최 회장에게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언론은 소버린을 맹비난했다. “외세에 맞서 전 국민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격문과도 같은 보도가 줄을 이었다. 여론도 이에 동조했다. 마치 국란(國亂)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위기감이 조성됐다. 그러나 정작 주주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최 회장이 철장 안에 있는 동안 소버린은 SK 주식을 맹렬히 매집했고, 최 회장 일가도 이에 질세라 주식을 사들였다. 종국에 최 회장 측은 15.93%까지 주식을 확보했고, 소버린은 바로 턱밑인 14.82%까지 매집했다. 그 과정에서 주가는 무려 5배나 올랐다.

금융업계에선 소버린과 같은 세력을 ‘행동주의 펀드’라고 한다. 사모펀드의 일종으로, 특정 기업의 주식을 매수한 후 지배구조 개선이나 배당금 확대 등 주주 환원책 강화를 적극 요구한다. SK 지분을 사들이며 경영 참여를 요구했다가 1조 원 가까운 차익을 가지고 떠난 소버린을 비롯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였다 매각하며 ‘먹튀’ 논란을 일으킨 헤르메스와 엘리엇, ‘기업 사냥꾼’이라 불리며 KT&G를 공격한 칼 아이칸 등 행동주의 펀드들은 늘 비난의 대상이 됐다. 주주 가치 제고나 경영 정상화는 다 명분이고, 결국 자기 잇속만 채우고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나 팔짱을 끼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개미 투자자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주주라는 자들은 언제나 주주 이익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내고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마냥 나쁘기만 한 일일까. 국내에서 활동한 행동주의 펀드의 사례를 다룬 책 <할 말 하는 주주>는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물음표를 던진다.

<할 말 하는 주주> 표지. <할 말 하는 주주> 표지.

한국에서는 2022~2024년 사이에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17건 있었다. 적다면 적은 횟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 70년 동안 단 8건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은 이 중에서도 ‘방만 경영’으로 유명한 KT&G와 칼 아이칸 간의 공방전을 주로 소개한다. 변호사 출신 펀드매니저인 저자는 이를 통해 행동주의 펀드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어떻게 주식시장을 변화시키는지를 알려준다.

‘주인 없는 기업’ KT&G는 올해 초 사외이사들의 호화 출장 논란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해외 출장 명분으로 열기구 여행을 하고 유학 중인 자녀를 만나고 여비에 출장비까지 챙겼다. KT&G의 도덕적 해이는 이뿐만이 아니다. 재임 기간 동안 주가가 21% 폭락했는데도 연봉 26억 원을 받는 사장, 자사주를 기부받아 주요 주주 자리를 차지한 복지재단과 장학재단, 호텔 식당에서 담배 도매상에게 수천만 원짜리 시계를 받는 사장…. 저자는 외국에서 말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무엇 때문인지 KT&G의 사례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러난 KT&G 도덕적 해이의 대부분은 칼 아이칸이 KT&G에 투자하고서 발견한 사실들이다.

이처럼 칼 아이칸은 KT&G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했고, 기업의 주인이 경영진이 아닌 주주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켰다. 책은 칼 아이칸 외 소버린, 일본 무라카미 펀드 등 다양한 행동주의 펀드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를 통해 기업 거버넌스의 여러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물론 행동주의 펀드가 반드시 정답인 것은 아니다. 중장기적으로는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으로 고용과 투자가 위축되면서 오히려 기업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행동주의 펀드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책 속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은 나같은 개미를 통쾌하게 한다. 그러나 통쾌함의 끝맛처럼 찾아오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 결국 국장(국내 주식시장) 탈출은 지능 순인가. 김규식 지음/액티브/388쪽/2만 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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