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아이들 옷이 깨끗했던 이유
김대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인권위원
1960년 7월 20일, 나라가 4월 혁명의 잔불로 들썩이던 때,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이 설립됐다. 형제육아원은 2년 후인 1962년 6월 9일 용당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시설의 운영 법인으로 1971년 발족한 사회복지법인 형제원은 1975년 7월 25일 부산시와 ‘부랑인 선도’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1976년 지금의 주례동으로 자리를 옮겨 형제복지원을 개소했다.
부랑인을 ‘선도’하고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는 뜻의 ‘복지’는 형제복지원 안에서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로 통용됐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의무교육에서 배제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성폭력 등을 겪었다. 사망할 경우 시신은 무연고 처리되어 암매장됐다.
이 형제복지원에 입소시키기 위한 부랑인 단속에는 경찰과 시청·구청 공무원이 합세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작성한 신상기록카드에 따르면 부산역파출소와 주례파출소의 단속 실적 건수가 가장 높았다.
복지라는 이름을 걸고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만,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이 ‘보호’와 ‘복지’를 명목으로 국가폭력을 일삼은 사례는 이것 외에도 더 있다. 1980년 법제화된 보호감호와 이듬해 설립된 청송보호감호소의 인권침해 실태가 그러하고, 보호감호소에서의 감금·제압 기술이 유사하게 재현된 2021년 화성외국인보호소의 미등록외국인 대상 가혹행위 사건이 그러하다.
정부는 과거 국가의 복지 의무를 주로 사회복지법인에게 떠맡기고, 법인의 파행적인 시설 운영을 묵인 또는 방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마땅히 할 일을 안 한 부작위의 책임과 더불어 천인공노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위의 책임을 모두 포괄한다. 부랑인으로 점찍힌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집어넣는 데 참여한 경찰 및 지방행정기관과 그들을 통솔한 한국 정부는 그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민간업자들이 끼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회피하지만, 여성들을 징모하고 접전 지역으로 이송하는 데 일본 정부와 군이 합세한 명백한 증거에 비추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20세기 말 나의 양친을 비롯한 부산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대문 밖에 내보낼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옷매무새를 바르게 할 것을 유달리 강조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와 퇴소자에 대해 지역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증언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그저 남에게 보일 입성을 강조한 것을 넘어 제 자식이 ‘부랑아’로 오인돼 시설에 갇힐 위험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의 폭력에 부작위와 작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