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성의 개념 쌓기] "시간이 더 있었으면 잘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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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철학과 강사

완벽주의 압박 시달리는 현대인 늘어
현실 세계에서 '완벽한 통제' 허상 불과
시간 부족 핑계로 자신 옥죌 필요 없어

‘완벽주의’라는 역병이 현대인을 갉아먹고 있다. 실제 소위 MZ로 분류되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완벽주의 수치가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는 많다. 타인이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느끼는 감정의 증가폭도 만만찮다. 그러니까 현대인은 스스로 완벽해지고 싶거나 혹은 사회적 관계를 위해 완벽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물론 완벽은 형이상학이다. 신발끈 묶기나 라면 끓이기 같은 단순한 일이라면 또 모를까,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엮이는 일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옛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이러한 음흉하고도 조악한 마음의 역량 밑으로 정치, 경제, 세대, 젠더, 기후 등 온갖 요인이 뒤엉킨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번잡하고도 역동적인 사건들은 사실상 통제 불능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 칼럼이나 국제외교 영역에서 쓰이는 ‘트럼프의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 같은 말에는 어떤 환상이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저 ‘아무도’에서 트럼프 본인은 예외인 듯한 은밀한 환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트럼프 본인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냥, 그리하여 이 세계엔 최소한의 확실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보존된다.

그러나 진실은, 트럼프 마음은 트럼프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매일 같이 쏟아내는 트윗들과 충동적인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엔, 특유의 즉흥성과 강경한 외관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질서도 없다. 트럼프의 마음을 읽으려는 시도는, 트럼프에 대한 일종의 철학화로 귀결된다. 니체는 완벽한 확실성을 찾으려는 철학을 일종의 시체애호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다뤄온 모든 것은 개념적 미라다. 어떤 현실적인 것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산 채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개념적인 파악은 그 생동한 현실에 대한 살해이다. 개념적인 파악은 말 그대로 개념적인 파악일 뿐이다. 완벽주의도 이와 같다. 이를 정의하자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결점 없는 완벽한 상태를 요구하며,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집착하는 심리적 성향 정도일 터이다. 이러한 완벽주의의 파산은 그 등장과 동시에 예고됐음은 물론이다. 반복컨대 세계에 대한 완벽한 정돈은 허상이며, 이는 완벽주의자를 우울증으로 몰고간다. 완벽주의가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시간이 더 있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고전적인 변명 속이다. 트럼프의 마음처럼, 완벽주의의 환상은 오로지 저 가정법 안에서만 보존되기 때문이다. 마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완벽을 거머쥘 수 있다는 냥, 나도 모르게 믿게 되지 않나?

그러나 무언가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두 가지 의미인데, 첫째, 앞서 말한 인간 변덕과 세계의 복잡계적 속성 앞에 ‘충분하다’라는 형용사는 애당초 성립하지 않고, 둘째, 완벽주의적 환상은 주어진 시간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후자에 집중하자면, 애당초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더라면, 주체는 완벽주의적 환상을 품지도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좀 더 정확히는 주체가 시간이 넉넉하다고 볼 때부터, 그 폭에 걸맞은 기대가 부푼다. 당연지사 이러한 거품은 기대를 높이게 되며, 이는 시작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그렇게 할 일을 미루는 걸로 헛되이 시간을 버리다가, 불안감 끝에 급하게 작업에 돌입하게 되고, 그런 뒤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물을 보며 “시간이 더 있었으면 잘했을 텐데”라고 툴툴거리는 뻔하디 뻔한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된다.

어쨌거나 짚고 싶은 건, 충분한 시간은 그 충분함을 모자람으로 바꿀 만큼의 완벽주의적 기대를 낳고, 그렇기에 완벽주의자에게 충분한 시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자면, 어째서 지금 저 완벽주의자는 주어진 시간을 넘어서는 기대를 가지려고 하는가? 앞서 말했듯, 완벽주의자들은 매번 터무니없는 기준을 설정하며 이에 집착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실패가 예정된 길을 끊임없이 설계한다. 그런데 설계된 실패는 사실은 실패가 아니다. 실패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이를 통해 얻는 이점이 있기에 저 기획과 재생산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를 통해 얻는 바는 무엇인가? 결과에 집중하자면, 이들이 반복해서 거두는 결과는 시간 속에서 충분성을 없애는 것이다. 묻건대 이것이 왜 즐길 거리가 되는 걸까?

여기서 마주하는 것은, 실제로 주어진 시간의 충분함이란 곧 주체의 지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충분한 시간은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음에도 속절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낼 위험성을 갖는다. 이 진실을 마주할 바엔 끊임없이 빠듯한 시간 속에서 소진되기를 택하며 웅얼거린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잘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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