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갈치역 91세 통역사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어요” 실버통역단 권용주 씨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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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권인채 대한독립애국단 결성
해방되기 한 해 전 만주서 작고
가족들 6·25때 귀국 부산 정착
“90대에도 배우는 건 즐거운 일”

권용주 씨는 부산도시철도 자갈치역 5번 출구 쪽 실버통역단 부스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다. 권용주 씨는 부산도시철도 자갈치역 5번 출구 쪽 실버통역단 부스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다.

‘91세, 중국어·영어·일본어 통역사’. 부산중구노인복지관 실버통역단 권용주 씨는 부산도시철도 자갈치역에서 일주일에 3일, 하루 3시간씩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한다. 만주에서 태어나 부산에 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녹아 있다.

“1933년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누군가 일본경찰에 밀고를 했대요. 한국에서는 살기가 힘들어져서 1930년께 가족이 만주로 이주를 했어요. 아버지는 해방 한 해 전에 만주에서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은 6·25전쟁 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권 씨의 아버지 권인채 씨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재학 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신현구와 함께 대한독립애국단을 설립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망 역할과 군자금 모금 등의 역할을 했다. 김재근과 강원도 철원군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충남 부여군에서 활동하며 지방 유력자, 재산가, 학교 등을 조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한 조사원 책임자 역할도 맡았다. 당시 김구는 황해 신천군, 신채호는 충북 청주군 책임자였다. 독립운동비화총서 〈다큐멘타리 임시정부〉 5권 독립운동연감에 명단이 실려 있는 등 여러 기록이 남아 있지만, 수형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포상은 받지 못했다.

권 씨는 만주에서 12살 때까지 살았다. 그때 기억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가족은 이모가 있는 대구에 잠시 살다가 부산에 정착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이라며 딸을 공부시켰다. “아버지는 늘 ‘알아야 한다’를 강조하셨어요. 여자라고 다르지 않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배워야 한다고 하셨죠. 돌아가시기 전에 쌍둥이 오빠들에게 ‘동생 공부시키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권 씨는 연희전문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래여고 재학 시절 전교 1등을 했던 통지표도 아직 가지고 있다. 권 씨는 “대학을 가는 바람에 더 고생했다”며 “없는 형편에 대학엘 갔으니 학비 마련해 가면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냐”고 웃었다.

결혼 후 부산에서 주부로 살다가 30대 때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교사가 아주 부족했던 시절이라 교사를 뽑는 시험이 있었다. 내성초등, 토성초등, 남일초등 등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퇴직 후에는 서울에 가서 손주들을 키웠다. 서울에서도 활달했다.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종이접기 1급 자격증을 땄다. 80세 되던 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친구 따라 갔다가 시니어 모델 무대에도 올랐다.

실버통역단 일은 10년 전 시작했다. 권 씨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살았지만, 막상 통역 일을 시작하니 부족함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에 무슨 힘이 났는지 초량 화교학교를 찾아갔어요. 원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중국어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죠. 노인이 공부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오후 4시에 일 마치고 찾아가면 선생님 한 명을 붙여줬어요. 그렇게 3년쯤 공부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중국어를 영어보다 더 많이 알아요.”

자식들은 언제라도 그만두라고 성화지만 권 씨는 “재밌고 보람 있다”고 했다. 대부분 길을 묻거나 지하철 이용법을 묻는 간단한 대화지만, 간혹 서로를 궁금해하며 길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종일 신이 난다. 대만에서 여행 왔던 젊은 교사와는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권씨는 90대라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지만, 지난해 전체 틀니를 하면서 기력이 떨어졌다고 했다.

“모임이 많았는데 코로나로 몇 년간 못 만나니 몸까지 허약해지더라고요. 그 사이 세상 버린 친구도 있고 거동이 어려워진 친구도 있어요. 안타깝고 서글프죠. 그래도 요즘은 행복하다는 걸 새삼 느껴요. 사장도 아닌데 이 나이까지 일을 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뿌듯합니다. 아직도 매일 어학 공부를 해요. 배우는 건 90대에도 즐거운 일이에요.”

글·사진=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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