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심’이란 광기… 400명의 난투극과 죽음[김백상의 레알]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군부심’은 자신이 속한 또는 속했던 부대에 대한 과시적인 자존심을 비꼬는 신조어다. 집단에 대한 자부심은 구성원의 단결 재료이지만, 과하면 타 집단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이 될 수 있다.
군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군사정권 시절, 부대의 명예를 걸고 대한민국 국군 수백 명이 패싸움을 벌였다. 실제로 목숨을 건 대결이었다. 해병대와 공군이 연병장에서 뒤엉켜 벌인 새벽 난투극은 어느 젊은 장교의 죽음으로 마무리됐다.
부산일보 8월 8일자 1면 지면.
저녁: 시비와 보복
1966년 8월 7일 일요일 오후 7시 20분 즈음, 시외버스 ‘경남 영 228’이 ‘덕두정류소’에 섰다. 지금의 부산 강서구 김해국제공항 근처로, 당시 김해 공군비행학교가 있었다. 버스는 부산 시내에서 경남 진해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에는 해병대 소위 8명이 탔다. 소위 임관 뒤 기초군사반 과정의 해병학교 35기들이었다. 대부분 주말 외박을 마무리하며 진해 해병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선풍기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한여름 버스 안은 분명 무덥고 습했을 것이다. 복귀 중인 해병대 소위들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스가 덕두정류소에 정차하자, 공군 장교 3명이 뒷문으로 올라타려 했다(1960년대엔 버스 뒷문 승차가 흔했다). 이때 해병대 소위들이 승차를 막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양측 사이에 시비가 생겼다. 공군 장교들은 결국 앞문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곧 해병대와 공군의 첫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8대 3의 싸움이니 당연히 폭행에 가까웠을 것이다. 맞은 공군 장교들은 버스 밖으로 쫓겨났다.
당시 언론 보도엔 ‘해병 장교들이 술에 취해 있었다’, ‘공군 장교의 모자를 빼앗았다’ 등 해병대 소위들의 무례함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있다. 해병대 출신 관계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버스 안에서 장교들끼리 어깨가 부딪혀 가벼운 시비가 붙었는데, 공군 장교가 내리면서 손가락 욕을 해 싸움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회상하는 해병 장교도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사건의 발단이 사소한 시비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공군 장교들이 버스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공군비행학교에 퍼졌다. 빨간 마후라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고 판단한 공군 전우들이 응징에 나섰다.
공군비행학교 교육생이던 장교 16명이 군용 트럭을 타고 버스를 쫓았다.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 지역에서 ‘경남 영 228’ 버스를 찾았다. 공군 측이 복수를 작정하고 덤볐기에, 이번에는 해병 장교들이 집단 구타를 당했다.
두 번째 충돌도 당시 기록과 관련자들의 회상이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공군 장병이 밖에서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피웠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구타는 당하지 않았다’, ‘공군 장교들이 30명 정도였다’ 등 해병대 출신들은 자신들이 당한 폭행 정도를 줄이고 수적 열세를 강조하는 증언을 많이 남겼다. 공군에게 당했다는 게 해병대 자존심으로는 용납하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6년 8월 8일 해병대의 공급비행학교 습격 사건의 이미지. 생성형AI 활용 제작.
새벽: 광기
다음 날인 8일 오전 5시 50분 즈음, 김해 공군비행학교 위병소. ‘퍽’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가른다. 위병소 헌병이 쓰러진다.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린 괴한은 헌병의 권총을 빼앗고, 전화선도 끊는다. 곧이어 주변에 숨어 있던 중대급 병력이 빠르게 부대로 침투하기 시작한다. 부대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나 군사 반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위병소 습격 10여 시간 전인 7일 저녁, 진해 해병학교 35기들은 단체 행동을 결의한다. 해병대를 건드린 공군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했다. ‘작전 계획’에 맞춰 8일 오전 4시께 해병 소위 128명이 부대를 몰래 빠져나온다. 35기 동기생 142명 중 당직 인원 등을 제외한 전체 인원이다. 외박처럼 보이려고 전투복 대신 정모와 하계 작업복을 입었다. 명백한 근무지 이탈, 탈영이다.
소위들은 경화역에 집결해 기차에 오른다. 무임승차이다.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 100여 명이 역무원을 지나치고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 조직원 복수를 위해 떼 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조폭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해병대 소위들이 기차에서 내려 버스와 트럭 등으로 갈아탄다. 목적지인 공군비행학교 부근에 도착하자, 군사 작전하듯 포복으로 부대에 접근하고, 위병소를 무력으로 접수한다. 다시 빠른 속도로 부대를 가로질러, 조종사 숙소까지 도착한다. 공군 측 당직사령관이었던 이양호 대위(1994~1996년 국방부 장관 역임)가 갑자기 밀려 들어온 해병대 장교들을 제지하며 실랑이를 벌인다. 그 사이 숙소 어디선가 물리적 싸움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당시 언론은 자고 있는 공군 장교들을 해병대 소위들이 기습해 구타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해병대 소위들이 자는 이에게 ‘선빵’을 날렸는지, 잠을 깬 공군 장교들이 놀라 덤비기 시작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두 진영은 마주치면 무조건 패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병대 소위들이 숙소에 있던 아령, 방화삽까지 휘두르며 상대를 공격한다. 공군 장교들도 손에 잡히는 것들을 던지며 대응한다. 서로가 뒤엉키며 부상자가 속출한다. 공군 장교와 해병대 소위들이 숙소에서 빠져나오면서, 무대는 연병장으로 옮겨진다.
이즈음 학교 전체에 있던 공군학교 장교와 사병들도 일제히 연병장으로 쏟아진다. 공군 측 300여 명, 해병대 측 100여 명 등 400명 넘는 이들이 주먹, 돌, 삽 등을 주고받는다. 웬만한 조폭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스펙터클한 규모의 패싸움이 벌어진다. 장병들의 뼈가 부러지고 곳곳에 피가 낭자한다.
사람 수에서 밀리기 시작한 해병대 소위들이 활주로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한다. 일부는 부대 내 비행기 뒤로 몸을 피한다. 이 과정에서 공군 경비행기들의 날개와 엔진 등이 부서진다. 장교들이 국방 전력을 훼손한 것이다. 해병대, 공군 모두 상대가 도망치거나 쫓아오면서 던진 돌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어쩌면 해병대의 공군비행학교 기습 사건 일명 ‘8·8 사건’은 60년대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만들어낸 도시 괴담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8·8 사건은 미화될 수 없는 비극이다.
부산 강서구 김해국제공항 전경. 1966년 8·8 사건이 일어났던 김해 공군비행학교 자리는 현재 김해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다. 부산일보DB
아침: 이의일 소위
오전 7시 즈음 해병대 소위들이 철조망을 넘기 시작한다. 공군비행학교를 빠져나간 이들은 빠르게 흩어진다. 그러다 무리의 일부가 철조망 밖 늪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해병대 이의일 소위다. 급하게 동기들이 그를 건져낸다. 상태가 심각하다.
이 소위는 늪 속 풀에 발이 엉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급하게 도주 중이었고, 격렬한 싸움에 체력 소모도 심했을 것이다. 평소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늪이었지만, 그는 그만 늪에 고개를 박고 쓰러졌다.
군인들이 의식 없는 이 소위를 공군학교 내 의무대로 옮긴다. 축 늘어진 이 소위를 본 해병대와 공군 장병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누군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수도 있다.
군의관이 현장에서 이 소위의 사망을 확인한다. 사인은 익사.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소위는 그해 봄 경희대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이 됐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막내아들이었다.
이의일 소위 외에도 39명이 부상자로 분류됐으며, 10여 명이 중상자였다.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2기도 파손됐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중당 김영삼 원내총무는 “군 통솔질서가 얼마나 엉망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라고 개탄했다. 마침 인근의 진해 저도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철저한 진상 조사를 주문했다.
국방부는 사건 발생 나흘 만인 12일 해병학교 중대장 등 핵심 장교를 중심으로 해병 10명, 공군 5명을 구속하는 등 4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러나 일부 지휘관이 옷을 벗었을 뿐, 대부분의 징계나 사법처리는 흐지부지됐다. 적잖은 관련자들이 훗날 군 주요 보직에 오르기도 했다.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반면 익사한 이의일 소위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마치 빨리 잊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8·8 사건은 언론에서 사라졌고, 어느 순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 2편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부산일보 <군인들끼리 집단 난투> 1966. 8. 8
부산일보 <관련 책임자 엄단을> 1966. 8. 9
경향신문 <지휘관도 엄중 문책> 1966. 8. 9
동아일보 <포복 기습 실전 방불> 1966. 8. 9
조선일보 <장교 30여명 입건> 1966. 8. 9
동아일보 <양쪽 15명 구속 군재회부> 1966. 8. 12
한겨레21 <질 수 없다. 해병이니까> 2013. 10. 30
한국학중앙연구원 구술자료관 <정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