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m 벽에 갇힌 삶… 단종·낙태에 죽으면 시신 해부까지 [이중의 억압 재일한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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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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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억압 재일한센인] ② 기쿠치케이후엔의 참상

강제징용 등 조선인 120명 입소
격리 제도화하고 도주 땐 감금
불임수술에 아이 대신 인형 품어
사망자 388명 해부, 태아표본도

지난 6월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에서 약 2m 높이 ‘격리의 벽’ 앞에 입소자 대표 오다 아키라 자치회장이 서 있다. 지난 6월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에서 약 2m 높이 ‘격리의 벽’ 앞에 입소자 대표 오다 아키라 자치회장이 서 있다.

지난 6월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 우거진 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회색 콘크리트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소자 대표인 오다 아키라 자치회장이 벽 앞에 서자 그의 머리 위로도 50㎝가량 공간이 남았다. 1929년 요양소 서쪽과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진 높이 약 2m, 길이 1㎞의 ‘격리의 벽’이다.

환자의 도주를 막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이 벽은 일본이 한센병 환자에게 가한 강제격리와 인권침해를 상징한다. 당시 요양소에는 24시간 순시가 이뤄졌고, 무단 외출하다 붙잡힌 환자는 감금실에 갇혔다.

이름은 ‘요양소’였지만 실상은 치료보다 격리와 통제가 우선된 강제수용시설이었다. 이곳에는 일본인 환자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징용된 한센인들만도 최소 54명의 조선인이 입소(부산일보 8월 14일 자 1면 등 보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전역의 국립 한센병요양소는 13곳에 달하며, 이 가운데 10곳에서 조선인이 수용된 기록이 확인된다.

■‘격리의 벽’, 안에는 감금실

부지 한가운데에는 고동색의 낡은 목조 건물 한 동이 서 있다. 1917년 만들어진 감금실이다. 바닥 면적 14.75평에 3개의 공간으로 나뉜 이곳은 격리의 벽과 함께 입소자를 옥죈 억압의 역사를 보여준다.

“원래 감금실 주변으로 벽돌담이 둘러져 있어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기쿠치케이후엔은 1909년 정원 150명 규모의 공립 규슈요양소로 출발했다. 1907년 일본 정부가 5개 지구에 공립 요양원을 설치하고 이른바 ‘나예방에 관한 건’을 공포하면서 부랑 한센병 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치료법조차 확립되지 않았고, 식량도 부족했다.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부터 사망자의 화장까지 다른 입소자들이 떠맡아야 했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채 갇혀 지내던 환자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처우 개선이 아니라 더 강한 통제였다. 1916년에는 요양소 소장에게 환자를 임의로 처벌할 수 있는 징계검속권이 부여됐다. 이듬해에는 규칙을 어긴 환자를 가두기 위한 감금실까지 설치됐다.

강제격리는 1931년 ‘나예방법’ 제정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모든 한센병 환자의 강제격리를 법으로 규정하면서다. 민관이 합세해 지역사회의 한센병 환자를 색출하는, 사실상 환자 사냥이나 다름없던 ‘무나현운동’도 이 무렵 시작됐다. 구마모토현은 이 운동이 특히 활발했던 곳으로, 입소자가 폭증해 1937년 1000명을 넘어섰다.

조선인 환자는 1925년 남성 4명이 처음 들어온 뒤 1937년엔 28명으로 늘었다. 이듬해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강제징용이 본격화되면서 숫자는 계속 늘어, 해방 무렵 62명, 해방 이후엔 최대 120명에 이르렀다. 시설은 확장을 거듭해 1950년께 면적 62만㎡의 거대한 마을 수준으로 커졌다.

■단종·낙태·골격표본 제작도

역사자료관 한켠 작은 나무 벤치에는 ‘타로쿤’, ‘토모코짱’ 같은 이름표를 단 아이 크기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결혼을 하려면 불임수술이 사실상 전제조건이었고, 설령 임신하더라도 낙태를 피할 수 없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부부들은 대신 인형에 이름을 붙여 함께 산책하고 말을 걸며 손수 옷을 지어 입혔다. 1953년 결혼한 한 입소자는 구마모토현 무라이현운동 검증위원회 청취조사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된 사람은 우생수술을 받았다. 싫어도 다들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2014년 공개된 검증보고서는 가장 참혹한 인권침해 사례로 꼽히는 인체 골격표본 제작의 경위까지 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옛 구마모토의과대학 조교수 스즈에 키타스는 1927년부터 규슈요양소 소장의 협조 아래 2년간 사망자 43구를 부검해 최소 20여 구의 골격표본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를 종합하면 이후 30년간 약 150구를 부검했고, 이 중 3분의 1가량에서 표본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검증위원회는 이 표본 제작이 한센병 체질유전설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유족과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 이뤄진 비윤리적 행위였다고 결론 내렸다. 또 전직 의사의 증언을 토대로 태아표본 제작도 "거의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2020년 기쿠치케이후엔은 소장자료 전수조사를 통해 1911~1965년 사망한 입소자 2383명 중 388명이 해부됐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골격표본이나 태아표본 제작에 관한 내부 기록은 나오지 않았지만, ‘태아표본을 봤다’는 증언이 있어 그해 11월 태아위령비를 세웠다.

해부나 골격표본을 둘러싼 진상은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최근에서야 조금씩 드러나는 중이다. 하물며 조선인 입소자의 피해 현황 등은 별도로 밝혀진 바가 없다. 지금까지 조사는 어디까지나 입소자 전체의 피해로 다뤄졌을 뿐, 국적이 다른 입소자들의 역사를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구마모토(일본)/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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