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과 부실이 만든 참사 구포역 열차 전복 [김백상의 레알 4편]
역대 열차 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
불법 부실 지하 공사가 원인된 인재
빗속 처참한 현장은 아비규환
90년대 잇단 참사 쓰나미 신호탄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졸고 있는 박진환(44) 씨를 누군가 깨웠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거였다. 박 씨는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다. 동대구역에서 입석으로 승차했는데, 빈자리에 앉아 있다가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자리 주인은 임신부였고, 다른 여성 일행도 있었다. 박 씨는 잠을 쫓으며 객차 뒷부분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적지인 부산 구포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아내와 어린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29분 직전 서울발 부산행 ‘제117호 무궁화호 열차’의 네 번째 칸은 여느 일요일과 같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박 씨와 임신부 일행 외에도 휴가에서 복귀하는 군인, 나들이 온 부모와 아이들도 있었다.
열차는 총 8개 칸으로 편성된 디젤기관차였다. 부산 북구 구포역을 1km 정도 앞두고 덕천천 주변을 지나고 있었고, 속도는 시속 85km 정도였다.
이때 열차 첫 칸인 기관차실에 타고 있던 노진환(32) 기관사가 전방 100m가 안된 지점의 철길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것을 발견했다. 노 기관사는 반사적으로 비상제동 레버를 꺾으며 급정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열차의 속도는 빨랐고, 남은 거리가 너무 짧았다. 열차가 휘어진 철길에 다다를 즈음, 땅이 무너지며 꺼져 버렸다. 순식간에 열차는 굉음과 함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날 이곳은 국내 철도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최악의 참사 현장이 됐다.
1993년 3월 28일 부산 북구 덕천동 구포역 1km 전방 지점에서 무궁화호 제117호 열차가 철로 아래 지반이 꺼지며 전복됐다. 역대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철도 사고이자, 불법 공사가 부른 인재였다. 부산일보DB
불법 하도급과 착각
그해 3월 북구 덕천천 주변에선 전선 지중화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 직경 4m 터널을 뚫고 고압전선을 매설하는 공사였다. 한국전력공사가 발주한 이 공사를 삼성종합건설이 수주했다. 총 사업비는 228억 원으로, 전체 공사 구간 3.4km의 일부가 덕천천 주변 철길과 가까웠다.
사고 전날인 27일 오후 1시 20분께 해당 지역의 첫 번째 지하 발파 작업이 진행됐다. 지하 30m 부근에서 화약이 터졌다.
시공사 삼성종합건설은 H사에게 하도급을 줬고, H사는 발파 작업을 별도의 작업팀에게 재하청을 주었다. 불법이었다. 재하도급은 과도한 수수료, 비효율적 작업 구조 등의 이유로 법으로 금지돼 있다.
삼성종합건설과 H사는 발파 작업에 필요한 별도 일부 지질 조사도 생략했다. 경비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서다. 철도청이나 지자체 등에 발파 작업을 알리지도 않았다. 철길 부근의 위험한 작업은 철도청에 보고해야 하지만, 공사 일정이 빠듯한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철길과 30m 가까이 떨어져 있어, 딱히 철길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낮다고 판단했다. 사고만 안 나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1차 발파 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지하수가 터널 내부로 쏟아졌다. 주변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신호였지만, 별도 안전 점검은 없었다. 오후 4시 40분 2차 발파 작업이 강행됐다.
현장의 작업팀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전 공사 과정에서 지반 붕괴가 잇따르자, 삼성종합건설 등은 임의로 작업 노선을 바꾼 적이 있었다. 정작 현장에선 노선 변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자신들과 철길의 거리를 30m 정도로 계산했다. 실제론 발파 장소가 이미 철길 구역 아래였다. 위치도 헷갈릴 만큼 급하고 부실한 공사였다. 이날 쓴 폭약은 40kg 정도였다.
다음 날 오전 추가 발파 준비를 하려 암반에 구멍을 냈다. 검은 흙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지만, 별다른 조처는 없었다.
오후 3시 30분 세 번째 발파가 강행됐다. 암반에 화약 15~25kg 정도를 넣고 터트렸다. 작업팀이 잔해물을 치우러 현장에 갔지만, 곧 철수했다. 터널 내부로 뻘과 물이 심각한 수준으로 들어와 작업이 불가능했다.
마지막 발파로 철길 아래 지반을 지탱하던 암석이 파쇄됐다. 철길 아래의 흙과 뻘 등이 부서진 바위 사이로 쓸려와 터널을 채우자, 철길 아래엔 커다란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가 4시 30분 즈음이었다. 작업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위에 철길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오후 5시 24분 제175호 무궁화호까지는 철길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잠시 뒤 땅이 꺼지면서 철길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 29분쯤 제117호 무궁화호가 다가오자 결국 완전히 지반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깊이 5m에 폭은 15m 규모의 거대한 구덩이, 대형 싱크홀이 생겼다.
1993년 3월 28일 부산 북구 덕천동 구포역 1km 전방 지점에서 무궁화호 제117호 열차가 철로 아래 지반이 꺼지며 전복됐다. 역대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철도 사고이자, 불법 공사가 부른 인재였다. 부산일보DB
아수라장
기관차가 먼저 구덩이에 빠졌고, 후면부를 두 번째 칸인 발전차가 들이받았다. 기관차는 흙 속에 박혔지만, 무겁고 탄탄한 구조다 보니 그나마 어느 정도 형체를 유지했다. 노진환 기관사도 찰과상만 입었다.
두 번째 칸인 발전차도 중장비로 가득 차 있어, 외형이 거의 유지됐고 파손 정도도 크지 않았다. 발전차 자체가 거대한 강철 덩어리였다.
객차는 달랐다. 열차의 세 번째 칸이었던 ‘6호 객차’는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발전차 후면부를 강타했다. 시속 85km 속도로 두꺼운 강철 벽에 부딪힌 것과 비슷했다. 뒤이어 네 번째 칸이었던 ‘5호 객차’가 6호 객차의 후미를 강타했다.
이렇게 열차 8칸 중 4량이 구덩이에 빠졌다. 나머지 4칸도 충격에 탈선하거나 급정거했지만, 6호와 5호 객차에 비하면 파손 정도는 양호했다.
발전차와 추돌한 6호 객차는 전면부가 압착돼, 깡통처럼 으깨졌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지면서, 차체가 찢어지며 두 동강이 났다. 뒤 칸의 5호 객차도 전면부가 찌그러졌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현장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 충돌 소리 뒤 비명 소리가 구덩이를 채웠다. 구겨진 객차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압사당했다. 객차가 찢어지면서 밖으로 튕겨 나온 부상자와 희생자들도 수십 명이었다. 5,6호 객차의 승객들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모두 몸이 부러지고 찢겼다. 객차 내외부는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져 나간 사람, 차량에 끼여 몸부림치는 사람, ‘내 다리 어디 있느냐’며 울부짖는 사람.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조선일보 1993년 3월 29일자 기사 중)
구조 작업도 더뎠다. 차체가 심하게 찌그러져, 객실 내 생존자 접근이 어려웠다. 굵은 빗속에서 철판을 하나씩 분해해야 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흩어진 신체 조각을 수습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밤이 되어도 어두운 객실에 갇힌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와 사고 소식에 달려온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당시 언론들은 이날 현장을 ‘지옥’, ‘아비규환’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구조 작업은 다음 날 오전까지 계속됐다.
제117호 열차엔 승객 634명, 승무원 6명이 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사망자는 78명, 부상자는 198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와 중상자는 5, 6호 객실에서 주로 나왔다. 1977년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 59명보다 더 많은 이들이 숨졌다.
휴일이다 보니 기차 여행 중이던 가족 단위의 희생자들도 많았다. 교외 나들이를 갔다가 일가족 모두가 희생된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다. 초기 사망자 명단에 ‘이하나(7·여), 이동혁(8), 정성훈(7)’ 등의 이름이 보인다. 어린 생명들도 이날 많이 희생됐다.
부산 구포역 열차 사고 이틀 뒤인 1993년 3월 30일 김영삼 대통령이 사고 현장을 직접 방문해 시찰하고 있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책임의 범위
사고 직후 1500여 명의 인력과 대형 크레인 등 중장비 100여 대가 투입돼 현장 수습과 임시 선로를 놓기 시작했다. 경부선은 사고 발생 이틀 뒤인 30일 오전에 정상 운행이 재개됐다.
사고 발생 11일 만인 4월 8일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종합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불법 지하 발파 작업으로 인한 100% 인재로 결론지었다. 최종 구속기소 인원은 16명이었다. 현장 소장 등은 물론 삼성종합건설 남정우 대표이사를 포함한 시공사, 시행사 임원들도 대거 포함됐다. 열차를 운행한 노진환 기관사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인정돼,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 임원, 한국전력공사 간부 등 6명은 재판을 거치며 무죄가 확정됐다. 경영진이 사고를 예방할 직접적인 의무는 없다는 논리였다. 현장소장, 감리사 등 현장 인력들은 집행유예에서 금고형 3년 사이의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에도 형사책임이 실무자들에게만 전가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특이한 것은 사고 관련 혐의로는 무죄를 받은 삼성종합건설 남정우 대표이사가 수사 과정에서 별건으로 뇌물죄가 드러났다는 거다. 그는 축협중앙회 발주 공사를 수주할 목적으로, 축협중앙회 회장에게 3억 2000만 원 상당을 건넸다. 큰 규모의 뇌물이었지만, 형량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에 머물렀다. 당시엔 부정부패가 훨씬 일상적이었고, 사회 분위기도 관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성종합건설은 타격이 컸다. 벌금 2000만 원, 과징금 2550만 원은 문제가 아니었다. 법정 최고 수준인 6개월 영업정지가 내려졌다. 이 때문에 1조 원대의 경영 손실이 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은 이 기간 해외 건설 시장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종합건설은 사고 3개월 만에 삼성건설로 사명을 바꾼다. 1996년에는 아예 삼성물산에 흡수합병돼, 삼성물산 건설부문으로 자리를 잡는다. 회사가 사라진 셈이다. 지금도 삼성건설이라는 별도 회사는 없다.
1995년 6월 29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됐다. 구포역 열차 사고를 시작으로 1990년대 초중반 대형 참사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부산일보DB
시작에 불과
최악의 철도 참사가 대한민국에 던진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은 비극에 금세 무뎌졌다. 잇따른 참사가 이전의 기억을 덮어버렸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는 시작이었다. 불과 4개월 뒤인 그해 7월 아시아나항공 733편이 추락해 68명이 숨지고 48명이 다쳤다. 10월엔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숨졌다. 몇 달 새 하늘, 땅, 바다 모두에서 대형 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붕괴(32명 사망, 부상 17명)했다. 1995년 4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사망 101명, 부상 202명)과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가 터졌다.
대형 참사의 쓰나미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참사의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구포역 열차 사고와 비슷했다. 안전의식 부재, 무리한 공사와 영업, 형식적인 안전 점검, 편법과 부정부패 등이 맞물려 벌어진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덜 성숙하고 덜 정의로워 그 많은 이들이 희생된 셈이다. 그래서 대형 참사는 이런 세상을 만든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다.
제117호 무궁화호 열차의 5호차에 탔던 박진환 씨는 사고 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참혹한 현장의 모습과 비명 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잠시 잠들었던 자리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됐다. 임신부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괴롭혔다. 이후 박 씨는 사고 피해 보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봉사활동을 조직하고, 틈틈이 자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억울한 죽음들을 목도한 이상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매년 3월 28일 사고 현장을 찾아 홀로 제사를 지내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렇게 기억하면 희생자들이 안식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일 것이다.
<주요 참고 문헌>
부산일보 <열차 전복 사상 최대 참사> 1993. 03.29
부산일보 <한전 지중 관로 공사 철도청과 협의 없었다> 1993. 03. 30
조선일보 <달리던 급행 추락 42년만의 대참사> 1993. 03. 29
중앙일보 <기관사 노진환씨가 말하는 사고순간/“지옥으로 떨어지는 듯” >1993. 03. 29
국제신문 <마음의 암' 트라우마 리포트> 2014. 09. 02
부산KBS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옥행 열차. 사사클럽> 2026.04.21
대법원 선고 94도660 판결. 1994. 5. 24.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