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걷는 부처는 왜 다시 내려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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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사찰 경내로 발을 들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번뇌의 소멸을 염원하는 적막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오랫동안 불교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치유적 기원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불교는 곧 실존적 고통에 대한 진단이자 치유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양산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 12월 4일까지 열리는 ‘어메이징 타일랜드: 태국 불교미술’ 앞에 서면, 그것이 불교의 전부인가 하는 물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태국 전역의 13개 국립박물관에서 엄선된 주요 불교 미술품 55점이 한자리에 모인 이번 전시는 문화적 교류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한다. 그것은 불교 사상에 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철학적 의문에 하나의 시각적 실마리를 건넨다: 불교는 고통의 소멸 그 너머의 무언가를 제시하는가?

통도사서 태국의 걸작 불상 보며

만물이 고정되지 않고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르침 느껴

초기 불교 경전은 종종 건조하게 들린다. 붓다는 자신을 실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로 비유하곤 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불교의 가르침이 고통의 제거, 집착의 내려놓음이라는 빼기의 과정에 매몰되어 있다고 우려해 왔다. 고통 없는 삶이 충만한 삶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온이나 신체적 안락을 넘어 가치 있는 삶을 갈망한다.

만약 불교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 외에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사상의 기획은 불완전할 것이다. 붓다가 고통을 가장 먼저 겨냥한 이유는 불타는 불길 속에 서서는 의미 있는 삶을 지어 올릴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집착의 소멸이란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강박적 불안으로부터의 근원적 해방이며, 이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삶을 전개할 무대를 활짝 열어젖히는 일이다.

이러한 삶의 긍정으로 가득 찬 지평은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이르러 확립되기 시작한다. 이 책 제24장 제39송에 대한 주해에서 철학자 제이 가필드는 사유하는 이들의 깊은 두려움을 건드린다. 만약 어떤 사물도 영원하지 않고 텅 비어 있다면, 그것은 삶이 무의미하고 절망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가치나 목적, 도덕이 성립하려면 그것이 ‘진정한 실체’라는 보증수표를 지녀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그 정반대를 역설한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고정된 세계야말로 성장이 불가능한 절망의 덫이다. 공(空) 사상은 이러한 숙명론을 걷어내며,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의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고 설파한다.

태국은 상좌부 불교의 나라이지만, 형상이 품은 뜻은 종파의 경계를 넘어 나가르주나의 언어로도 읽힌다. 먼저 눈여겨볼 작품은 머리 위에 ‘라사미’ 장식이 얹혀 있는 아유타야 시대의 불상이다. 라사미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 빛을 시각화한 것이다. 공의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깨달음이란 곧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을 아는 것, 즉 그 어떤 존재도 고정된 본성을 지니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앎이 허무의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이 절망이 아님을 말해 준다.

보관불(寶冠佛)도 상징이 풍부하다. 보통 불상이 출가자의 모습으로 소박한 승복을 걸치고 있는 것과 달리, 이 화려한 장신구와 보석으로 치장된 형상은 왕의 위엄을 띤 채 빛난다. 부처를 왕의 모습으로 빚었다는 것은, 깨달음이 세속의 영광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 형상은 인간이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찬란하고 충만한 삶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비춘다.

이번 전시의 최고 화제작은 2층 전시실에 홀로 놓인 수코타이의 ‘걷는 부처’이다. 이 불상은 흔히 붓다가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 설법을 마친 뒤 인간 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으로 읽힌다. 깨달음을 이룬 이가 천상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는 순간을, 조각가는 뒤꿈치를 막 떼어 낸 발걸음으로 붙잡았다. 명상에 잠겨 좌정한 정적인 부처와 달리, 이 걸작은 성스러운 자리를 떠나 일상의 세계로 성큼 걸어 나온다.

걷는 부처는 우리가 삶 전체를 통해 지향하는 궁극의 이상을 체화하고 있다. 그는 천상을 떠나왔듯 산속 은신처에도 머물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활짝 피어나는 삶을 추구한다. 나가르주나가 열어 보이는 좋은 삶의 비전이 이 불상의 발걸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시장 문을 나서 천년 고찰의 경내로 걸음을 옮기면, 고색창연한 전각들 위로 시암의 황금빛 여운이 포개진다. 나가르주나는 공이 성립하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중론 24장 14송). 철학과 예술이 나누는 이 살아 있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참된 각성이란 세속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만물이 텅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환희에 찬 자각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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