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밀라노에서 디자인을 다시 묻다

  • 가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정열 당신의브랜드 대표



디자이너에게 ‘좋은 디자인’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말이다. 2008년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 그 답은 분명했다. 보기 좋고 메시지가 잘 전달되면 좋은 디자인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눈에 띄게, 더 명확하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곧 실력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잘 만든 결과물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느껴졌다.

지난 9월, 그 빈자리를 안고 부산시와 부산디자인진흥원의 ‘부산 미래 디자이너 양성 지원 사업’을 통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했다. 인근 베르가모에서 세계적인 인터랙션 디자인 교육기관 CIID와 함께한 교육의 주제는 ‘The City as a Relational Device’, 도시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장치로 읽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NoLo, Porta Nuova, Bovisa, Porta Romana 등 성격이 다른 밀라노의 지역들을 걸으며 공간이 사람들의 행동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동네마다 사람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오래된 동네와 새로 개발된 지역을 오가다 보니 건축물 자체보다 그 안에서 누가 머물고, 누구와 만나고, 어떤 관계가 생겨나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질문도 바뀌었다. ‘멋진 공간인가?’보다 ‘누가 이곳을 편안하게 이용하고 있는가?’를, ‘잘 디자인되었는가?’보다 ‘낯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가?’를 묻게 된 것이다.

그 질문을 더 무겁게 만든 것은 건축가 주세페 테라니였다. 이탈리아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그의 건축은 지금 보아도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대표작 ‘카사 델 파쇼’는 파시스트당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완벽한 비례와 빛이 한 체제의 권위를 떠받치는 데 쓰였다는 사실 앞에서, 아름다움만으로는 좋은 디자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만들었는가만큼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가가 중요하다. 디자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연수 중 찾은 Lake Como Design Festival의 올해 주제는 공교롭게도 ‘Border’, 즉 ‘경계’였다. 경계는 안과 밖을 나누는 ‘단절’의 선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가 맞닿는 ‘결합’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도시와 사람의 관계를 관찰한 직후였기에 이 단어는 내게 더욱 깊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도시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 오래된 동네와 새 동네,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는 늘 경계가 있다. 디자인은 그 경계를 더 선명하게 긋는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관계를 시작하는 접점이 될 수도 있다.

부산으로 돌아와 돌이켜 보니, 세계의 디자인을 경험한 것만큼 의미 있었던 건 내가 살아가고 일하는 부산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일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디자인을 해 왔지만, 이번 연수를 통해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깊은 성찰과 시선의 전환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지속되기 어렵다. 부산시와 부산디자인진흥원의 ‘부산 미래 디자이너 양성 지원 사업’과 같은 글로벌 디자인 연수 프로그램이 앞으로도 꾸준히 유지되고 확대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많은 지역 디자이너들이 세계의 현장에서 디자인의 윤리와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그 경험을 지역 사회의 자산으로 환류할 수 있는 제도적 토양이 튼튼하게 다져지기를 기대한다.

디자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가치는 누구에게 닿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도시의 수많은 경계는 사람을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를 만나게 하고 있는가.

어쩌면 좋은 디자인은 이 질문에 답하는 데서가 아니라, 이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