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9) 미추왕과 대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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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나라 지킨 기상,천년 세월 적막한 아우성

경주박물관서 안압지 지나 첨성대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대릉원 주차장이 보인다.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는 계림 숲 금궤에서 나왔다. 황금 궤짝에서 나왔다는 탄생설화를 갖고 있지만 아마도 김알지는 금을 다룰 수 있는 북방 도래인 집단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곧바로 신라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이미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박씨, 석씨 집단과의 상당 기간 파워 게임을 한 후에 김알지의 7세손 미추왕이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미추왕을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해놓았다.

대릉원을 찾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릉원 하면 몰라도 천마총은 안다. 사실 천마총은 대릉원 안에 37기(번호를 붙인 것은 14기)의 고분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천마도가 나와 그렇게 이름 붙였다. 반월성 북쪽에 있는 대릉원은 수학여행 코스의 필수이고, 우리 국민 중 경주에 왔다면 한번 들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사람 없어 좋은 월요일 오전인데 6월 하순으로 기우니 여름 같은 더운 날씨다. 대릉원 안에 들어서자 이내 시원했고 쭉쭉 뻗은 소나무가 도열해 반기며 짙은 녹색의 단풍나무 숲길이 우리를 인도했다.

대릉원 안의 미추왕릉을 담장 쳐놓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경주 김씨로서는 첫 왕이기 때문이다. 입구에 늘어져 너울거리는 수양버들이 성숙한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둘러쳐진 담장과 굳게 닫힌 문을 보니 자유를 누리고 있는 다른 고분에 비해 얼마나 답답할까 안쓰럽다. 동행한 이들에게 겹치고 이어지고 솟고 완만하고 거대한 고분 선(線) 흐름의 포인트를 말해주니 모두들 가슴으로 소리치면서 격정의 신음소리를 울린다. 어제부터 우리 집에 머물면서 한국의 문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오이와 도시코(大岩淑子) 교수는 급기야 고분 앞에서 느리고 강하게 온몸으로 즉석 춤을 발산하고 학생들은 잔디에 주저앉아 일어날 줄 몰랐다.

지난해 이맘때가 연상된다. 인천 아시안게임 신용석 조직위원장이 급히 전화가 왔다. 2014년 아시안게임 유치 투표권을 가진 아시아 체육회장들이 서울에 왔는데 최고급 호텔에 맛있는 음식으로도 서울서는 감동을 받지 않아 경주서 1박2일을 보내러 온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선물이나 돈 좀 준다고 표를 찍어주지 않고, 마음을 움직여야 된단다. 하기야 지금 시대는 차(車)도 배(船)도 예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시대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던 그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이곳 대릉원이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 사람들은 1천년 2천년 하면 좀 놀라지만 이집트나 중동 사람들은 1,2천년이라고 해도 반응이 없다. 마침 때 맞추어 대릉원 고분의 푸른 잔디 위에 바람은 싱그럽게 불어 하얀 '삐삐'가 한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중국 캐나다같이 넓지는 않지만 산의 주름을 펼치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작은 나라가 아니다. 그 주름의 골짜기 골짜기마다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고분 위의 아득한 저런 모습을 가슴에 담아 한국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고분과 고분의 겹치고 솟구치는 저 아름다운 선을 담아낸 한국의 곡선미를 보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인천은 인도 뉴델리를 제치고 아시안게임 개최지가 되었다.

▲ 대릉원의 거대한 고분들 사이에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작은 고분(가운데).


▲ 선이 고운 대릉원의 여러 고분들.


죽어서도 나라 걱정

13대 미추왕(262~284) 시기의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제일 약소국이었다. 더구나 미추왕 재위 시기는 백제의 많은 침략에 천재지변이 생겨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의 아픔을 함께하다 보니 죽어서도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두 번의 사연을 기록해 놓았다.

14대 유리왕 때 이서국(청도) 사람들이 신라 수도 금성을 공격해 왔을 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도와주고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미추왕릉 앞에 댓잎이 쌓여 있었다. 그제야 선왕(미추왕)의 음덕임을 알았고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미추왕이 죽고 495년이 지난 37대 혜공왕 15년(779) 4월에 김유신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무덤 속에서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춘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다. 무기를 가진 40여 명이 뒤따라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능 안에는 소리 내어 우는 듯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룬 공이 있고,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죄 없는 자손이 죽임을 당했다고 이제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은 그만하고 멀리 떠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베팅'을 하고 있다. 미추왕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라면서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달란다. 김유신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세 차례 부탁에도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혜공왕은 두려워 대신 김경신(뒷날 38대 원성왕)을 특사로 김유신묘에 가서 사과하고 절(취선사)에서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사도 시조 박혁거세의 오릉(五陵)보다 위인 대묘(大廟) 위에 둔다 했다. 이제 김씨 세력이 온 신라를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대릉원에 얽힌 사연

천마총(155호분)과 황남대총(98호 고분)의 발굴은 국가적인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1973년 천마총 발굴현장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와서 격려하고 연이어(3일 뒤) 국무총리(김종필)도 왔다. 더구나 당시 인부들 하루 인건비가 600원, 발굴조사원이 1천200원, 소갈비 1대가 500원 할 때 대통령 금일봉 100만원과 총리의 격려금은 발굴단원들에게 감동의 물결이었단다.

금관을 막 들어낼 때는 그토록 맑던 하늘에 천지를 울리는 뇌성에 벼락이 떨어지고 비가 쏟아져 무덤 속에 있던 사람들은 새파랗게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었단다. 천마총을 발굴할 때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왜 하필 미추왕릉 부근의 무덤을 파느냐"고 항의했다면 황남대총 발굴할 때는 경주 김씨뿐 아니라 박, 석, 김씨의 합동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문화재 발굴도 좋지만 조상의 뼈와 얼을 지키기 위해서도 왕릉을 마구 파헤치는 것을 후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발굴에 참여하여 고분 박사가 된 지건길씨는 그 뒤 경주박물관장과 중앙박물관장을 지냈고, 유명한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도 이곳을 다녀갔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아름다운 페르시아 유리 빛깔을 보고 가야금 명창 황병기는 '비단길'을 작곡하였고 토속적인 문화에서 세계적(국제적)인 신라 사람에게 무용곡을 위탁받았다는 침묵의 향기인 '침향무'가 탄생한다. 왕들은 금을 좋아하는지 당시에 발굴하다가 금이 나왔다 하면 발굴단장은 보존 처리고 뭐고 보따리 싸들고 청와대로 달려가 각하에게 보여주고 대통령은 금잔에다 술을 따라 마시는 진짜 왕이었다.

1973년 7월 이 천마총 금관도 곧 바로 청와대로 갔고 현장으로 되가져왔다. 다시 1년 뒤(1974년 10월) 황남대총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지만 이때는 8·15광복절 행사 때 문세광의 총에 육영수 여사를 잃은 상태라 금관이 나왔다고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해 7월 박 대통령은 직접 쓴 대릉원(大陵園) 현판도 한번 볼 겸해서 황남대총 남분을 방문했다. 북분에서 나왔으니 남분에서도 당연히 금관이 나올 줄 알았지만 금관이 안 나와 실망했으며 대통령은 한 번 더 주변의 무덤을 발굴하여 금관을 찾도록 발굴단장에게 지시했다. 김정기 단장은 "미추왕릉 앞의 규모가 작은 고분을 고려해 보겠다"했고 10·26 대통령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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