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를 찾아서] <27> 부산 사상초교 버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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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램프 거인처럼 아이들 감싸

부산 사상초등학교 운동장 가에서 굵다랗게 자라난 버즘나무. 아름드리 몸속에는 100년의 학교 역사와 함께 스쳐간 많은 아이들의 꿈이 아직도 간직되어 있는 듯, 푸른 손바닥을 흔드는 넓은 잎이 무성하게 돋아나 있다. 사진=조기수

무더운 날 걷다가 나무그늘을 만나면 참 고맙다. 내려쬐는 햇빛이 덥다고 짜증내는 아이들을 구슬리며 걸어갈 때 길가 나무들은 나를 거들어주곤 했다. "뛰어가 시원한 나무그늘 속으로 숨자"고 부추기면 아이들은 금방 까르륵 웃으며 서로 먼저 그늘에 가닿겠다고 여린 주먹을 흔들고 나무에게로 뛰어갔다. 땀을 식히고 난 뒤 "또 다음 나무그늘로!" 소리치며 뛰어가 굵다란 나무둥치를 보듬고 우리는 햇빛 폭격을 따돌린 것을 재밌어했다. 나날의 불편 속에는 예상치 못했던 그만큼의 즐거움이 등장하곤 했다. 그건 우리 주변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이웃들이 부추겨주는 선물이었다.

하얀색·녹색·회갈색 뒤섞인 껍질

얼굴에 핀 '버즘' 닮아 이름 붙여

힘든 시절 생활의 땟물 고스란히


오랜 날 우리의 이웃 중 하나였던 이 가로수 이름은 플라타너스로 더 익숙한데 우리나라 이름은 버즘나무다. 나무껍질이 퍼즐조각처럼 떨어지며 하얀색, 녹색, 회갈색으로 속살이 드러난다. 그 모습이 못 먹고 자라던 시절에 아이들 살갗에 핀 버짐 같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어떤 이는 지저분하다고 이 이름을 싫어하기도 하는데 나는 버즘나무라는 이름에 정이 간다. 버즘나무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 심어진 1910년경부터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전쟁과 혼란을 사람들과 함께 지낸 힘든 생활의 땟물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어 허기를 달랬던 시간을 힘 모아 통과한 동지애가 풍겨난다.

버즘나무는 넓은 손바닥 같은 잎이 무성하고 자람이 빨라서 가로수로 많이 심었고 학교 운동장 둘레에서도 곧잘 보게 된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지루한 눈길을 창으로 돌리면 운동장 가 묵묵히 흰 구름이 걸려있던 버즘나무를 누구라도 추억할 수 있다. 푸른 하늘에 젖어있던 나무를 보며 우리는 어떤 맑은 꿈을 키워갔던가.

부산 사상초등학교의 버즘나무들도 그런 추억의 시간이 쌓여 아름드리로 굵어졌다. 1910년 사상역 자리에서 사립 명진학교로 설립되어 1920년 지금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니 이 버즘나무 열 그루도 그때 심어져 학교의 역사와 함께 자라왔을 터이다. 그러니 나무는 100살이 가깝겠다. 햇빛의 기세가 한풀 꺾인 늦은 오후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새처럼 무슨 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논다. 버즘나무 아래에도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 흙장난에 빠져있다.

버즘나무는 오래되고 굵어지면 줄기의 속이 썩어서 공동(空洞)이 생긴다. 그 안이 커서 사람들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다. 미국의 초기 개척자들은 이런 공동이 있는 버즘나무를 이용하여 가축우리로도 쓰고 사람이 사는 집으로도 삼았다고 한다. 사상초등학교 버즘나무 한 그루도 공동이 생긴 것을 시멘트 같은 걸로 채워 놓았다. 비어 있다면 아이들이 들어가 놀 수도 있겠다.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진 버즘나무에는 실에 매단 것 같은 귀여운 방울 열매가 달려있어 추운 날에도 즐거운 느낌을 안겨준다. 그 모습 때문에 북한에서는 '방울나무'라고도 부른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이 방울을 땋아서 머리를 때려주는 장난을 하곤 했는데 맞으면 분할 정도로 아팠다.

작은 운동장과 작은 아이들을 감싸고 선 버즘나무들은 동화 속에 나오는 램프의 거인같다. 아름드리 몸속에는 100년을 한결같이 운동장에 뛰놀던 아이들의 꿈을 간직하고 있을까. 오래된 나무들도 쉽게 베고 교체해 버리던 시절을 무사히 넘기고 열 그루가 늠름히 자라고 있는 걸 보면 작고 소박한 학교지만, 나무를 사람의 소중한 동반자로 여길 줄 아는 사랑의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무를 지켜주었음을 알겠다. 다만 가지치기를 너무 많이 한 듯 나무둥치에 비해 가지가 자연스럽게 높이 뻗어 오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버즘나무는 넓은 잎으로 대기의 먼지를 흡착시켜 청소해 주는 일을 하고 도시의 소음을 흡수시키는 방음의 역할을 어느 나무보다도 충실히 해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 두통에 시달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건 거리의 청소부 같은 버즘나무의 공력이 크다. 그런데도 눈에 띄지 않는 오랜 고마움을 사람들은 쉽게 잊고 한 때 잎 뒤에 난 털이 기관지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여 베어내고 새로 관심을 받는 나무로 교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좇아가는 우리 도시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은 더 소중한 가치를 아름드리로 가꾸어 가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조금 손해 보는 경우도 익혀나가야 할 것이다. 대상과 나는 언제든 자리바꿈이 되지 않던가? '더 좋은 것'보다 '함께 살아가는 불편'을 버즘나무를 보며 생각해 본다. 이선형·시인 andl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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