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훈의 부산 돋보기] 조선 통신사의 랜드마크, 영가대(永嘉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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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촬영한 영가대 전경. 언덕 위 측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영가대다. 부산박물관 제공

영가대는 그리운 옛 건축물이다. 통신사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부산포의 랜드마크였다.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인공 언덕에 지은 누각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한데 통신사역사관 앞에 새로 복원한 영가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옛 누각의 풍모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원래의 위치에서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자리는 범일동 부산진시장 서쪽의 철로 변이었다. 그나마 옛터에 1951년 범일동 주민들이 영가대 기념비를 세워 두었으니 다행이다.

부산포 대표 상징물 영가대
본래 자리는 부산진시장 서쪽

조선 통신사 출발 도착 지점
능풍장 철거되면서 사라져


영가대는 1614년 경상도관찰사 권반(權盼)이 설치했다. 당시는 임진왜란의 여진이 남아 있고, 왜적에 대한 방어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부산포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전함이 빨리 노후화하는 일이 발생하자 권반은 항만 기능을 진작시키기 위해 준설 공사를 시행한다. 지리적으로 이 일대는 동천에서 흘러내려 온 토사가 모래 턱을 형성하여 썰물 때에는 전함이 빠져나가는 데 애를 먹었다. 이때 판 준설토가 높은 언덕을 이뤘으니 권반은 바다를 구경하고, 망도 볼 수 있는 누각을 세웠다. 그 뒤로 부산을 찾은 이민구 선위사(宣慰使)가 이곳에 영가대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영가(永嘉)는 권반의 본향(本鄕)인 안동의 옛 지명을 가리킨다.

1617년 오윤겸이 영가대에서 처음 일본으로 출발한 후로 통신사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기점이 되었다. 통신사 일행에게 영가대야말로 출발할 때는 그립고, 돌아올 때는 반가운 조선의 아이콘이었다. 또 영가대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였다. 통신사가 출항하기 전에는 반드시 무사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올렸다. 통신사의 사행길은 기나긴 만리 길이었으며, 수행인원이 자그마치 500여명이었다. 위험한 해난사고가 언제든지 통신사 일행을 덮칠 수 있었다. 통신사 일행은 떠나기 전에 영가대에서 제당을 차리고, 제물을 진설하여 꼭 바다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해신제를 올리기 전에 제관들은 필히 목욕재계를 하고 술 담배를 끊는 등 엄격한 금기도 뒤따랐다. 이렇게 영가대는 해신을 정성껏 모셔 통신사 수행을 무사히 마치기 위한 기원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영가대는 부산포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다. 부산포를 떠올리면 바로 영가대가 연상될 정도로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부산을 찾은 사대부들이 꼭 들르는 유람 코스였으며, 시인 묵객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동래부사들이 부임을 한 뒤로 영가대에 들러 빼어난 부산포의 절경을 시 한 수로 읊었다. 예컨대, 강필리는 영가대에서 본 수려한 경치를 "바다가 높은 난간에 들어와 홀연 한 잔 술이 되었네"라고 노래했다. 영가대는 한 폭의 그림도 되었다. 이성린이 통신사의 여정을 그린 '사로승구도권'과 김윤겸이 영남지역의 명승지를 그린 '영남기행화첩'에 영가대가 등장한다. 부산진지성 바로 앞에 아담한 언덕이 솟아 있으며, 그 위에서 아름다운 영가대가 먼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영가대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삽시간에 그 지위가 흔들렸다. 일제는 조선 침탈과 군수 물자의 수송을 위해 한반도 종단 철도의 부설에 매진했다. 이때 경부선이 영가대 옆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근대의 철도는 쏜살같이 지나가면서 조선의 영가대를 짓눌렀다. 통신사가 해신제를 지내고 출발했던 영가대의 기능도 이미 소용이 없어졌다. 일제는 선린 외교의 상징을 오히려 장애물로 여기고 별다른 보존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후 영가대는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능풍장(陵風莊) 마을로 옮겨졌다. 별장이 철거되면서 영가대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류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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