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정교분리’에 대한 오독(誤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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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변호사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이 헌법에 명문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 수정헌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수용하여 우리 헌법 제20조 제2항에서도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유명한 말, ‘진리는 너무나 위대해서 홀로 내버려 두어도 승리한다’는 데 있지 않은가 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 법률적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종교인들 중심 집회와 시위 행위

내심 머무를 땐 절대적 영역이나

외적 행위는 법률 제한 이뤄져야


종교로 정치적 영향 미치면

신 이름 자체에 대한 오독 우려

이젠 국가와 동거 모델 찾을 때


최근 청와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종교단체의 외침에는 정부가 먼저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을 깨고 종교를 탄압한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종교인 과세까지 시행하니 그 불만은 극에 달한 것이리라. 하지만 최근 종교계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을 보는 일반 사회의 시각에서는 일부 종교단체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깨고 정치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기독교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裏面)에는,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다른 이해가 존재한다. 그들은 ‘정교분리 원칙의 참뜻은 교회에서 절대 정치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앙인은 정치를 생각하고 기독교의 믿음에 합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히려 국가권력이 종교인이 갖는 예배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오해하여 너무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어서 문제였으니 이제 적극적으로 정치 영역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정교분리의 원칙의 근원적인 뿌리를 찾아보면 가까이는 영국 국교회에 대한 반발과 당시 신대륙에서 특정 종파의 우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와 정치의 혼합에 대한 반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샤머니즘 시대에는 신탁(神託)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에는 교황의 이름으로, 절대군주 시대에는 왕의 이름에 신의 권위를 더해 왕권신수설을 만들어 정치 권력을 시녀화시켰던 과거에 대한 자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부터 정교분리가 왜곡되게 수입되어 오랜 기간 오해의 대상이 되었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진보적인 기독교 인사들이 반독재투쟁을 할 때 보수 기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비판하는 등 시대와 위치에 따라 각자의 관점에서 잘못 원용된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정세 변화와 사회적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 기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정치의 무대에 화려하게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의 정치 참여 자체야 뭐가 문제겠는가. 그리고 그 사상적 배경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도 관심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선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소음에 지쳤고, 근처 장애인 학교에서도 더 참을 수 없는 지경임을 호소하게 되었다. 결국 여러 사정을 고려한 경찰은 청와대 앞에서 이루어지는 보수 기독교 집회를 ‘예배’가 아닌 ‘정치 행위’로 규정하고 새해부터는 이를 금지하겠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집회 자유는 표현의 자유이지 의사를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다. 주민들과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다’는 취지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의 출발점인 종교의 자유가 내심에 머무를 때는 절대적 보장의 영역일 수 있으나, 외부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외적 행위에 대하여는 법률에 의한 제한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영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종교인들 중심의 집회와 시위의 경우에는 더욱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정교분리는 종교인의 정치 참여 자체를 막지 않는다. 막아서도 안 된다. 종교인도 시민이고, 국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단체로,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는 자제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정교분리 원칙을 각자 자신의 입장에만 유리하게 오독(誤讀)하다 보면 현대판 ‘왕권신수설’이 재등장하게 될 수 있고, 이러한 극단적인 외침은 오히려 신의 이름 자체에 대한 오독(汚瀆)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정교분리의 출발이 사회 내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묵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임을 기억하고 종교가 국가 속에서 아름답게 동거하는 모델을 찾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종교가 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열쇠가 될 것이고, 그걸 신(神)도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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