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말할 수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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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아무도 모르게 옮겨붙은 불씨 하나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른다. 놀란 사람들이 거센 불길을 겨우 끄지만, 그 열기만은 여전히 거기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감당할 수 없는 불길을 닮은 영화이다.

18세기 말 프랑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 의뢰를 받고 도시에서 배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와야 있는 부르타뉴 지역의 외딴 섬을 찾아온다. 초상화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와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 그리고 저택의 살림을 담당하는 하녀 소피까지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며 상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불길 닮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토론하며 재해석하는 장면 인상적


여성 초상화 화가·결혼 앞둔 귀족

계급·관습·성별 뛰어넘는 행보로

사랑에 빠졌다 현실 돌아오게 돼

여성 예술가 삶 섬세하게 그려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작품답게 서사가 뛰어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해석한 부분은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하데스는 돌아가는 길에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궁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게 되고 에우리디케와 이별한다.

영화에서는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한자리에 모여 이 신화를 함께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오르페우스가 돌아보는 장면에서 세 명의 의견이 대립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르페우스의 슬픔으로만 신화를 이해했다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에우리디케를 조명한다. 그녀들은 오르페우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는데 이 장면은 흥미롭지만, 슬픈 씬이다. 그녀들은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에우리디케 입장을 대변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리안느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받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전시한다. 수도자로 살고 싶었지만, 언니의 운명을 떠안아 결혼해야 하는 엘로이즈,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소피, 결혼을 거부하다 죽은 엘로이즈의 언니, 밀라노에서 이국땅으로 시집온 엘로이즈의 엄마인 백작 부인까지 결국 그녀들은 신화 속에서 오르페우스의 슬픔을 부각시키는 에우리디케의 존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들을 애처롭거나 동정의 시선으로 포착하지 않는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견고한 세계가 미약하게나마 흔들린다. 이는 백작 부인이 저택을 비워야만 가능한 조건이다. 백작 부인이 도시로 떠난 후 그녀들 사이에 존재했던 계급·관습·성별 등에서 발생하는 차별이 느슨해진다. 세 여성은 마을 축제에 참여하고, 사랑에 빠지고, 아픈 하녀를 위해 노동을 한다. 엘로이즈가 바라던 대등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감독 또한 그녀들을 비출 때 평면적으로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는데 이는 계급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인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백작 부인이 저택으로 오면 그들의 관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지만, 함께 한 기억은 쉽게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떠올라 미소 짓게 만들고,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흘리게 한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헤어졌지만, 잊지 않는다. 감독은 이 지울 수 없는 감정들과 더불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섬세한 연출로 전달한다. 또한 음악을 최소화하고 이미지만으로 스크린을 압도하는 영상미는 마치 한 편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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