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5.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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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엔, 고흐의 열정이 상처같이 남아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치료를 위해 머물다 생애를 마감한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작은 기차역 전경. 빈센트 반 고흐가 치료를 위해 머물다 생애를 마감한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작은 기차역 전경.

프랑스 파리 북서쪽 27㎞ 지점에 오베르쉬르우아즈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 퐁투아 역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가면 도착하는 곳. 인구가 채 1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이곳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인생을 마감한 곳이어서 꾸준히 찾는 사람이 많다.


세잔·피사로·고흐 등 거장들과 인연

파리 북서쪽 27km ‘작고 조용한 마을’


병 앓던 반 고흐 오베르로 이사 와

‘닥터 가셰의 초상화’‘까마귀 나는 밀밭’

마지막 70일간 70여 점의 작품 남겨

고흐와 동생 테오의 공동묘지도


■오베르쉬르우아즈

오베르 역에 내리면 “정말 작고 조용한 동네구나”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온다. 역 앞 거리에 빵집과 슈퍼마켓, 식당이 몇 개 있지만, 사람이 사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가끔 왕복 2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과 관광객들만 아니라면 온종일 사람 구경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오베르 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철로를 건너가는 지하도다. 한데 놀랍게도 지하도가 온통 그림 천지다. 입구부터 지하도 안은 물론 반대편 출구까지 노란색 그림들로 가득하다. 겉으로 보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지만 제법 수준이 있어 보인다. 마치 동화의 세계 같다. 아니 현실 속의 비현실이랄까.


역사 벽에 걸린 고흐 그림. 역사 벽에 걸린 고흐 그림.

오베르 역사에 들어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역사가 마치 작은 미술관 같다. 노란색 벽에 갖가지 그림이 걸려 있다. 물론 진본은 아니고 모사본이나 복사본이다. 대부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다. 아무리 가짜라고 하지만 역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준다.

오베르 마을이 유명한 것은 여러 미술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즈음, 예술가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폴 세잔,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카밀리 피사로, 장-밥티스트-카밀 코로, 그리고 고흐다. 오베르 마을 주변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피사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도비니가 살던 집은 지금 박물관으로 변했다.


■빈센트 반 고흐

여러 미술가 중 오베르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는 빈센트 반 고흐다. 1890년 병을 앓고 있던 고흐는 의사 폴 가셰 박사가 사는 오베르로 이사했다. 피사로가 고흐에게 가셰 박사를 소개했다. 가셰 박사는 다른 미술가들도 여러 명 치료한 의사이면서 아마추어 미술가였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구스타프 라부가 운영하는 라부 여관에 묵었다. 두 평짜리 다락방을 한 달에 3프랑 50센트를 주고 빌렸다. 지금 그 집은 박물관으로 변했다. 1층은 레스토랑, 2층은 고흐기념관이다. 고흐가 묵었던 곳은 3층인 지붕 아래 다락방이다. 한 평 크기의 다락방엔 작은 창문 하나가 있다. 여기로 빛이 가늘게 들어온다. 마치 고흐가 품었던 삶에 대한 희미하면서 가는 애착이 빛을 통해 느껴진다. 벽 한쪽에는 ‘언젠가 나도 카페에서 내 전시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자신을 위로했던 고흐의 편지가 붙어 있다. 이곳이 박물관이 된 이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

고흐는 이곳에서 죽기 전까지 70일 동안 살았다. 그는 하숙집 앞 시청 건물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아드렌느, 가셰 박사, 가셰의 정원 등을 소재로 70여 점에 이르는 그림과 비슷한 숫자의 드로잉을 그렸다.

그중 가셰 박사가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닥터 가셰의 초상화’라는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이 그림은 1990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 일본인에게 8250만 달러(1114억 원)에 팔렸다. 이후 다시 영국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9000만 달러(1216억 원)에 매각됐다.


지하도의 벽화. 지하도의 벽화.

오베르 역에서 나와 거리를 건너 언덕길을 5분 정도 올라가면 아담한 크기의 교회가 나온다. 고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오베르쉬르우아즈의 교회’라는 그림에 등장한다. 그림에서 교회 앞은 환하고 밝다. 반면 교회와 뒤 하늘은 어둡고 칙칙하다. 옆으로는 한 여자가 지나간다. 그는 희망의 상징이어야 할 교회 배경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고흐는 자살하기 한 달 전쯤 이 그림을 그렸다. 지금 교회 앞에는 그림을 담은 안내판이 서 있다. 오베르 곳곳에는 이런 안내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고흐의 그림 무대가 된 장소를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청 건물과 고흐 그림을 담은 안내판. 시청 건물과 고흐 그림을 담은 안내판.

오베르 교회에서 나와 언덕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밀밭이 나온다. 맨땅도 있고 푸른 밀이 심어진 곳도 있다. 고흐가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현장이다. 역에서 보면 좁은 것 같던 언덕이 막상 눈앞에서 보니 넓기가 이를 데 없다. 흐린 하늘 아래 밀밭 사이로 난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까마귀는 보이지 않는다. 오뉴월이면 밀밭이 조금씩 익어간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때도 그즈음이었다.

고흐의 건강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1890년 5월 21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병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지금도 조금 전부터 통증에 시달리고 있어”라고 적었다. 7월 10일 편지에서는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나 내 인생은 뿌리부터 위협받고 있는 것 같아. 발걸음은 너무 불안해”라고 토로했다.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장소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림을 그렸던 밀밭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마구간이라 말하기도 한다. 총알은 심장을 관통하지 못하고 갈비뼈를 맞고 튕겨 위장에 박혔다. 그래서 그는 현장에서 죽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가 한동안 고통스러워하다 눈을 감았다.

밀밭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공동묘지가 보인다. 고흐가 묻힌 곳이다. 그는 죽은 다음 날 여기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테오 외에 고흐의 친구, 동료 화가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장례 미사는 별도로 진행되지 않았다. 신부가 자살을 이유로 장례 미사 집전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고흐의 관은 노란 꽃으로 덮였다. 장례식에 참가했던 한 지인은 고흐의 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란 해바라기, 노란 다알리아, 그리고 다른 모든 노란 꽃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가 가장 좋아했던 색이죠.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에도 깃들어 있기를 그렇게 바랐던 색이랍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무대인 도비니 박물관 앞 언덕길(위)과 그가 그린 그림.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무대인 도비니 박물관 앞 언덕길(위)과 그가 그린 그림.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 그의 무덤을 덮은 노란색 꽃잎들이 모두 질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았던 테오도 네덜란드에서 형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유해는 1914년 오베르쉬르우아즈 공동묘지로 이장돼 형 옆에 나란히 묻혔다.

다시 언덕을 내려오면 도비니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길에는 계단이 보인다. 고흐의 ‘오베르 거리와 계단’의 무대이다. 역으로 가는 길에 시청과 라부 여관이 보인다. 고흐는 시청도 그림에 담았다. 당연히 시청 앞에도 안내판이 서 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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